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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 꽃샘바람 속에서 <세한도>를 보며
| 2008·11·18 20:39 | HIT : 1,208 | VOTE : 293 |
4월의 해산토굴 다담

꽃샘바람 속에서 <세한도>를 보며


한승원(소설가)




꽃샘추위가 한겨울의 그것보다 더 맵차다. 우루루 우루루, 바람이 토굴을 흔들어댄다. 으스스 춥고 고독하고 불안해지면 여느 때보다 차를 짜게 우려 마시게 된다. 추사도 아마 나처럼 추위와 고독을 많이 탔을 터이고, 차를 짜게 마셨을지도 모른다. 마당에 출렁거리는 대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본다.


<세한도(歲寒圖)>에는 소나무[松柏] 네 그루가 있다. 추사는 혹한의 겨울 속에서도 변함없이 푸르른 마음을 형상화시키기 위해 소나무를 동원했다. 줄기가 없지만, 칼 같은 잎사귀와, 봉(鳳)이나 흰 코끼리의 눈 같은 꽃으로 기품을 드러내는 난초가 도학자의 풍이라면, 줄기가 튼실하고 헌걸찬 소나무는 유학자의 풍이다.


유학자이면서 시인인 사람들은 근엄하면서도 멋스럽다. 소치가 그린 소동파와 김정희의 입극(笠○)상처럼. 극도로 고독하고 신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서는 처량함과 신기가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추사의 소나무들은 신들린 강신무(降神巫)들 같다. 의젓한 춤사위로서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 하는 지식인 강신무. 소나무는 재미있는 나무이다. 지맥 속에 뿌리를 깊이 묻고 짙푸른 하늘을 푸른 가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의젓한 양반 춤의 춤사위이다.  


소나무가 드리우고 있는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먼저 보고 태허(하늘) 속에 머리를 묻고 사유하고 있는 그것을 보면 고뇌하는 젊은 석가모니의 모습이다. 하늘과 달과 별과 구름과 새들과 소통하는 소나무의 몸에는 신화로 가득 차 있다. <세한도>의 구도를 보면, 겨울 한파와 적막과 침잠 속에서 다사로운 몸피를 둥그렇게 키우고 있는 우주의 시원을 형상화시키려 한 추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설 전후의 고추맛보다 더 매운 찬바람이 몰아치니 모든 짐승과 새들은 모습을 감추고, 푸나무들은 죽은 듯 말라서 적막하건만 건장한 소나무만 푸른 가지를 뻗은 채 우뚝 서서 제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하는 늙은 소나무를 부축하고 있다. 젊은 소나무의 부축으로 말미암아 늙은 소나무는 간신히 푸른 잎사귀 몇 개를 내밀고 있다.


그 두 나무 옆에 집 한 채가 있는데, 그것은 신산한 삶을 산 소동파 시인이나 유마 거사처럼 절대고독을 씹으며 사는 한 고독한 자의 집이다. 추사는 자기 처지와 비슷한 삶을 산 소동파와 유마 거사를 동경했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앓고 있는데 어찌 세상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겠다는 자가 앓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며, 바야흐로 병들어 있음을 주위에 소문내고 누운 채 문병하러 찾아오는 불보살들에게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해탈의 진리를 설한 유마 거사. 유마 거사는 오묘한 진리를, 이미 깨달을 만큼 깨달은 문병꾼들에게 설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기의 집 거실을 텅 비워 놓았다.


왜 텅 비워 놓았을까. 그 해답은 '텅 비워 놓은 공간[空]' 속에 있다. 그것은 일체의 탐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문병꾼들에게 '진짜 깨달음의 세계(眞空妙有)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추위 속에서 얻은 무한 광대하고 둥근 깨달음[圓覺]은 텅 빈 하늘과 신(神)을 흡수지처럼 빨아들인 신묘한 힘이다.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고, 사해의 물을 한 개의 털구멍 속에 쑤셔 넣을지라도, 수미산과 겨자씨와 사해의 물과 털구멍들이 모두 전과 다름없는 그 신묘한 힘은 노장의 무위(無爲)와 다르지 않다.


그 힘은, 소동파나 유마 거사처럼 세상을 사는 집 주인으로 하여금 장차 병에서 일어나 중생들과 더불어 살게 할 터이다.



*

나무.  
푸른 가지들을 하늘로 쳐들고 있는 나무.
'그곳에 이르고 싶다는 말'을, 인도의 한 왕자는 '나무[南無]'라고 말하라고 가르쳤지만 나는 '나[我] 무(無)'라고 발음한다. 어디에 이르게 해달라는 '나무'인가, 그곳은 마음 텅 비운 내가 돌아갈 하늘(태허), 그 푸른 시원의 시간이다.

바람이 분다. 치열하게 살고 싶다.


바람, 그것은 신의 몸짓, 하늘의 말이다. 우루루 우루루 바람이 말한다. 추사처럼 갇혀 살아가되, 그렇게 갇혀 사는 삶을 아름답고 슬프게 형상화시키며 살아가라고.



-《차의 세계》4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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