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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의 생성의 미학] 한국 선시의 세계
 선재마을  | 2010·12·19 18:34 | HIT : 2,618 | VOTE : 754 |
“서로 마주하자 이미 뜻이 그치거늘”
[임동확의 생성의 미학] 한국 선시의 세계  

2007-11-16 오전 10:27:56                  [임동확 _ 시인]  






미국 전역을 자전거로 독파한 어느 한국인 여행가는, 전날 머물렀던 기숙지에 깜박 잃고 온 물건이 있어 왔던 길을 다시 뒤돌아갔지만 그 길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 자신이 그 길을 거쳐 왔음에 분명하지만, 그 어떤 하나의 풍경도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모 신문에 연재된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문득 선적 체험을 떠올린 적이 있다. 20여km나 되는 그 길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그 순간들만은, 적어도 그 여행가과 자전거, 길과 몸은 하나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전거 타기에 열중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대상으로 길과 자신의 몸이 일치 되어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든 결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듯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러한 선적 상태에 빠져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오랜 수도와 참선을 선사(禪師)들이나 스님들이나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적 체험은,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듯 떠나고 머물며 앉고 눕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 자체를 떠나있지 않다. 범인(凡人)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렵게만 느껴지는 선(禪)의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주체와 대상을 구분이 무화되는 전인격적인 일체감을 맛볼 때 가능하다. 잠시나마 사는 데 급급하는 동안 잃어버린 천지자연의 속삭임이나 숨결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역대의 선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평상심이 곧 진리’(平常心是道)이며, 그걸 알 때 ‘날마다 행복한 날’(日日是好日)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되찾을 수 있을 때, 까닭 모를 불안과 번민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주인공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통찰과 교감을 회복할 때, 단 한 번도 오염되지 않는 본래의 자신을 회복한 참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통찰과 교감

한 특정 종교를 넘어 한국의 선종(禪宗)이 지향해온 바는 바로 이것이다. 조선조의 체계적인 탄압과 한국 근대화 과정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선불교는, 감각과 마음이 하나 된 순수경험으로 살아 숨 쉬는 선(禪) 체험을 중시해왔다. 발상지인 인도나 그 중계지인 중국에서조차 거의 끊기다시피 한 선맥(禪脈)이 정작 그 변방국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선의 정신은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우주적 마음에 상통해 있음을 가르치고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바 있는 경봉 스님(鏡峰,1892~1982)의 선시(禪詩) 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밥과 떡은 물과 하나 되어 희고        飯餠水與白
      햇감은 크고 대추는 붉구나             生枾大棗紅
      상에 차린 맛좋은 음식 빛깔은         床頭珍羞色
      노랗고 검으며 또 푸르스름한데       黃黑兼次靑
      모든 형태의 사물들마다                  形形物物體
      제각기 육미를 갖춰 아름다운데       各俱六味佳
      다 거둬 한 입 속에 털어 넣으니       盡收一口裏
      돌아간 곳 역시 흔적조차 없네         歸處亦無痕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바 있는 경봉
스님(鏡峰,1892~1982)
경봉은 바로 선시의 제목을 통해 ‘진리는 바로 눈앞에 있다’ (「목격도존(目擊道存)」)는 해 우리가 찾는 진리가 다름 아닌 일상생활과 격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늘상 마주치고 맛보기도 하는 상 위의 밥과 떡, 대추와 감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 속에 진리가 구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각기 다른 형태와 색깔과 맛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마다 자연의 전체상이 녹아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각기 육미를 갖춰 아름다운’ 현상을 떠난 초월적 진리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역대의 선사들이 추구해온 선적 진리나 진실은 결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 사이의 밀접한 상관성(緣起) 속에서 현전하는 그 어떤 것이다. 측량할 수 없는 깊이에서 주체적이고 경험적으로만 파악되는 것이, ‘한 입 속에 털어 넣’자마자 ‘돌아간 곳 역시 흔적도 없’는 것이 불교적 의미의 ‘진여(眞如)’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갑각류처럼 굳은 마음과 편협하기만 한 인간적 관점을 벗어나면, 모든 만물들이 근본적으로 평등한 세계의 실상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과문한 탓이지만, 그러나 한국의 선사들의 활동이나 지금껏 축적되어 왔을 선시(禪詩)의  양과 질에 비해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선’은 서구인들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아시아와 한국 사회가 이미 서구와 그리 다르지 않는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누구의 탓을 할 필요가 없이 스스로 묵살되고 소외시켜온 결과이다. 또한 국내적으로 대부분의 선시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으며, 기존의 번역이 오역과 졸문(拙文)으로 점철되어 있는 탓도 크다.  

세계에 한국의 ‘선’은 없다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오늘날의 세계에서 한국의 선이 차지하는 위치는 지극히 미미하다. 세계인들에겐 오로지 중국의 찬(Ch'an)이나 일본의 젠(Zen/ぜん)이 존재할 뿐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선의 일본식 발음인 ‘젠’이 ‘선’을 대표하는 국제 공용어로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따라 세계인들이 접하는 선시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선시나 일본의 하이쿠들이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제넘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국의 역대 선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홍보할 세계적 학자의 확보와 품격 높은 선집 발간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와 같은 현상은 지속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동서양 과학계와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카프라(Capra, Fritjof)의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이 대표적인 예이다. 단적으로 이 책 속에서 한국의 선은 없다. 서구 세계에 일본문화와 일본 불교를 세계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본 학자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가 소개한 일본의 선시가 있을 뿐이다. 일본을 직접 여행하기도 했던 롤랑 바르트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 문화의 매력에 흠뻑 빠진 바 있는 그는 『기호의 제국』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 이론을 기반으로 선시로 착각한 일본의 하이쿠에 대한 공감과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카프라나 바르트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일본식 ‘젠’은,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의 선시와 그 거리가 멀다. 특히 근세에 들어서야 독자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은 하이쿠 작가들의 대부분이 선문(禪門)과 무관하며, 무엇보다도 선적 통찰과 언어적 직관의 만남이라고 할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텍스트에 선시라고 인용된 작품 대부분은 정확히 5․7․5의 음수율과 17자로 구성된 일본 전통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일본인들이 홋쿠(發句)라고 부르는, 첫 구는 반드시 계절을 상징하는 ‘키고’(季語)를 삽입해야 하며 그 노래가 지어진 배경 등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던 기존의 ‘렌가’(連歌)와 ‘하이카이’(俳諧)의 연장일 뿐이다.

일본 하이쿠의 대표적 작가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하이쿠 두 수를 살펴보기로 하자.

     잘 살펴보면
     냉이 꽃이 피어난
     담장이로다
     (よく見れは薺花さく垣かな)


      옛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들자
      물소리 첨벙
      (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

본래 무사(武士) 집안 출신이었던 바쇼가 방랑하면서 쓴 위의 두 하이쿠―정확히는 하이카이―는 언어의 함축적 전개와 돌연한 비약, 갑작스런 단절과 여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선시와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특히 일상어의 어법과 논리를 초월한 듯한 포즈와 때로 기발하고 충격적인 이미지 사용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선시의 어법 사용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우선 하이쿠는 형식상 5․7․5조의 음수율의 고수와 함께 반드시 ‘키고’(季語)와 더불어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주기 위한 ‘기레지’(切字)를 넘어야 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문학 장르이다. 형식상의 제약 때문에 애초부터 어느 것에도 자유로운 선의 정신을 감당하기 힘들다.

하이쿠에 필수적인 ‘기레지’는 그에 대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즉 ‘~이로다(かな)’와 ‘~이여(や)’와 같은 감탄어미 내지 호격조사는, 제한된 글자와 구조에서 오는 문제를 어느 정도 보완하고 극복해주는 시적 장치라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작가의 생각과 이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갖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하이쿠가 자연스런 감동과 화해를 이끌어내는데 부적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관적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주객일치의 선미(禪味)를 보여주려 하고 있지만, 형식상의 구속력과 그로인한 불충분한 내용 전개 때문에 자칫 억지스런 감동 일체감을 강요할 위험성이 크다.

내용상으로 분석해 보면 더욱 그렇다. “잘 살펴보면 / 냉이 꽃이 피어난 / 담장이로다”는 구절 속엔 우선 ‘본다’는 행위의 주체와 그 대상으로서 ‘냉이꽃’과 ‘담장’이 분리되어 있다. 또한 ‘잘 살펴보면’라는 전제와 ‘냉이꽃이 피어난 담장이로다’는 결론이 보여주듯이, 엄연히 인과율이 적용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냉이 꽃’을 바라보는 주체와 ‘담장’이라는 대상의 구분이 뚜렷하다. 드러나지 않는 시적 주체와 ‘냉이 꽃이 피어난 담장’ 사이의 동화(同化)는 있을지언정, 여타의 선식들이 보여주는 주객미분의 순수 경험 내지 직접 경험이 드러나지 않는다. 지적 분별이나 구분을 넘어선, 능동적인 창조자로서 활달무애(豁達無碍)한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첨벙’이는 ‘물소리’와 ‘개구리’의 관계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바쇼의 하이쿠에서 ‘물소리’는, 어디까지나 ‘개구리’가 ‘옛 연못’으로 뛰어든 탓으로 일어난 사태이다. 즉 행위자로서 ‘개구리’와 그 결과로서 파생한 ‘물소리’가 명확하게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이쿠의 대가로서 바쇼가 선적 경지를 열고 있다는 평가와 달리, 주체와 대상의 분리에 따른 작위성 또는 인위성이 느껴진다. 객관적인 소여대상으로서 ‘냉이꽃’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주관이 융합한 ‘절대적 주관성’ 운운하는 스즈끼 다이세쯔의 평가는 과장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바쇼의 두 하이쿠와 조계종 2세 조사(祖師)를 역임한 바 있는, 진각국사 혜심(慧諶,1178~1234)의 선시 「작은 연못」(小池)과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람 없는 연못에 물결 일지 않고           無風湛不波
      삼라만상이 눈으로 가득 펼쳐오는데      有像森於目  
      어찌 많은 말 갖추는 게  필요하랴          何必待多言
      서로 마주하자마자 이미 뜻이 그치거늘  相看意已足  

바쇼의 하이쿠 작품들과 달리, 혜심의 ‘연못’은 ‘바람’으로 인한 ‘물결’ 작용이 일지 않는 다. 진여(眞如)와 세속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상징물인 ‘연못’이 해맑고 잔잔하다는 것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즉 ‘바람’이 불지 않는 ‘연못’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서로에게 녹아든 선적 적정(寂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일체의 대립이나 간극이 없는, 맑은 거울 같은 ‘연못’과 동일시된 ‘눈’ 속에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치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세계는 문자와 말을 넘어선 세계이며, 그걸 표현하려 할수록 왜곡되거나 그르치기 마련이다. ‘이미’ 주객이 융합된 상태이기에 어떠한 의미작용도 일어날 수 없어 즉각적으로 그 ‘뜻’을 헤아리기를 그친다. 이성을 통하여 그 세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기에 더 이상의 언어나 말이 불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서로 ‘마주치자마자’ 이미 상통(相通)하기에 그 의미를 분별하려는 것은 부질  없는 행위에 속한다.

바꿔 말하면, 바쇼의 두 하이쿠 작품들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행위자와 행위 대상이 구분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관찰자가 자신을 대상 속으로 투사하는, 감정이입(感情移入;einfuhlung)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것들은 인간 이외의 정신 상태나 감정 속으로 이입하기보다 ‘함께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공감(sympathy)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근본적으로 타자(관객)를 자기(작가)의 관점에서 동일화시키는, 주체(인간) 중심적 사고의 연장일 뿐이다.

반면에 혜심의 선시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마음속으로 현전하고 있는 상태이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의 구성성분이 되어 녹아들어 있는 상태이기에 눈앞의 사물을 하나의 재현 대상으로 삼은 것을 넘어서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관계가 되어,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직각적으로 접하고 있다. 의식이나 개념의 그물망에 갇히기 이전의 일어나는 순수 경험이, 단적으로 선시의 경험이자 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어떻게 언어화 할 것인가


조선말기 선불교를 진작시킨 선의 혁명
가이자 대승 성우(鏡虛 性牛, 1849∼19
12) 선사
주지하다시피, 그러한 선의 세계는 문자나 언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궁극적인 경험으로서 오묘한 선의 맛(禪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不立文字)는 입장을 고수한다. 특히 그것은 ‘일체의 가르침이나 지식으로 전할 수 없다’(敎外別傳)고 역설해왔다. 하지만 문자나 지식으로 전해줄 수 없다는 그 말 자체 역시, 이미 언어라는 점에서, 분명 선의 세계가 언어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어에 대한 극도의 회의와 불신조차, 바로 그 언어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만큼 누가 제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경지를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즉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지 않으면 선시의 존재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며,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모든 선시는 용도폐기 될 운명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는 언어와 지식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을  붙잡을 수 있는 고도의 정신적 능력의 소유자가 다름 아닌 선사이며, 언어가 끊어진 곳에 현성한다는 진리(言語道斷)의 체현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높은 선적 경지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그러므로 그걸 알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선이 언어와 문자를 초월한 것이며, 그래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만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작 그걸 언어로 포착하는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투과(透過)하지 못한 자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진정 어떤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그 실재(當體)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가 어느 날 문득 불도(佛道)의 진리를 확연히 깨달은 순간을 문자로 옮긴  「오도송」(悟道頌)은 그러한 언어적 난관을 돌파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그것들은 언어가 ‘달’로 대변되는 선적 깨달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보여준다. 정말 일정한 선의 경지에 오른 자라면, 마땅히 그 경지를 있는 그대로 현현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오랜 수련과 각고의 참선 속에서 그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얻은 깨달음을 언어화한 것이 다름 아닌 「오도송」인 셈이다.

그 한 예로 경허(鏡虛) 성우(惺牛,1849~1912)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살펴보자.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남 말을 듣는 순간    忽聞人語無鼻孔
     온 누리가 바로 나의 집임을 즉각 깨쳤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저 멀리 아랫길로 걸어가며     六月燕岩山下路
     시골사람이 하릴 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경허 스님은 ‘콧구멍이 없다’는, 곧 인간이 특별이 갖춰야할 근본심성이 없다는 타인의 ‘말’을 ‘듣는 순간’ 홀연 ‘온 누리(三千大天)가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집임을 깨’닫는다. 인간 모두에게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본분사(本分事)를 깨닫는 ‘순간’, ‘나’와 세계가 동체대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생명력이 무르익어 가는 ‘유월’의 ‘연암산 저 멀리 아랫길’로 ‘하릴 없이 태평가를 부르’며 가는 ‘시골사람’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이 깨달음으로 오는 ‘나’의 희열과 다르지 않다. 즉 경허의 「오도송」은 그러한 선적 체험을 객관화하고 성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걸  언어화하는데도 큰 장벽이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다. 수많은 선사들이 보여준 「오도송」들은, 그런 점에서 일단 그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언어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뭇 선사들이 지적하는 언어의 불안정성이나 불완전성은, 선적 깨달음을 궁극적인 절대가치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지, 무조건 언어의 무용성을 주장하거나 배타시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는 순간 어긋나거나 왜곡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 그들이 모든 언어적 의미작용을 전적으로 부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선적 언어야말로 언어화하기 어려운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언어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깨달음을 언어화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문득 자타(自他)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선적 체험을 통해 전인격적인 새로이 주체가 생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선적 개오(開悟)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르다. 다시 말해, 깨달기 전에 내 눈앞의 세계는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으로 갈라져 있지만, 그 경계가 무르녹아 내린 이후의 ‘나’에게 자아와 세계, 주체와 타자는 둘이 아닌 하나의 몸이다. 온갖 상대나 비교가 끊긴 이후 ‘나’의 마음 속에 늘 대상을 현시하고 있으며 그 대상 역시 ‘나’ 마음을 현시하고 있다.

개오(開悟)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

고려말 국사(國師)를 지낸 바 있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32)의 「오도송(悟道頌)」의 하나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조주 출신의 옛 조사는 사라져 갔지만     趙州古佛老
      뭇 성인이 갔던 길 그대로 끊어버렸네     坐斷千聖路  
      터럭 불어 붉은 낯바닥 들어 올리고        吹毛覿面提
      몸을 꿰뚫어 보지만 흠 없는 걸 보네       通身無孔窺
      여우와 토끼 모두 사라진 곳 뒤좇으니     狐兎絶潛蹤
      몸을 바꾼 사자가 저절로  나타나고        翻身獅子露      
      감옥의 빗장을 때려 부수고 나자            打破牢關後
      맑은 바람이 태고로부터 불어오네          淸風吹太古

보우는 문득 ‘조주고불’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조주(趙州, 778~897) 선사가 남종선(南宗禪)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으로부터 남악, 창원, 석두, 황벽, 남전 등으로 이어진 선적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그가 볼 때, 조주 선사는 자신의 스승들을 무조건 추종해가기보다, 반대로 ‘뭇 성인들이 갔던’ 선(禪)의 ‘길’을 ‘그대로 끊어버’리는 ‘좌단’(坐斷)을 보여준 용기 있는 선사이다. 마치 머리칼을 불어헤쳐 그 머릿속에 난 상처를 찾듯 그 허물을 들춰내보고자 해도, 그 어떤 흠도 찾을 수 없는 선사 중의 한 명이 바로 조주이다.

문제는 보우 또한 조주가 보여줬던 선적 독행(獨行)의 정신을 보여주느냐의 여부인데, 그의 「오도송」은 그 결과이자 확인이다. 그렇다고 보우가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깨달음을 위해 과감히 자신의 스승에게마저 고개 숙이지 않았던 조주선의 계승자였던 보우 역시 자신의 「오도송」을 통해, 기존의  ‘여우와 토끼’와 같은 기존의 생각이나 아집을 버리고 ‘사자’와 같이 용맹한 정신의 주체로 다시 태어났음을 선언한다. 편협한 자아의 ‘감옥의 빗장을 때려 부수고 나’서는 존재의 각성 내지 결단을 통해, 훼손되고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한 나’와 대면하는데 성공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다시 강조하면, 보우는 혜능의 남종선(南宗禪)과 더불어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한국 땅에 전파한 선사답게, 그 어떤 우상이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않는 무서운 주체성과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자신이 속한 ‘그 어디서든 노예가 아닌 주인공’(隨處作主)임을 선포하고 있다. 자기만의 편견과 아집으로 무장한 기존의 소아(小我)를 벗어던지며 대아(大我)가 성취한 절대 주체로서 보우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전인미답의 참된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고 있다.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부처’나 ‘조사’뿐만 아니라 설령 ‘부모’라도 ‘죽이는’ 임제선(臨濟禪)의 계승자답게, 그 어느 구속에서도 자유로운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듯 선불교가 자주 설파하는 무아(無我)는 그런 점에서 현대 철학적 의미의 주체 부정이나 불신과는 거리가 멀다. 절대적 근원의 해체나 데카르트적 주체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는 측면에서 일견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속에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절대 긍정의 정신이 빠져 있다. 주체와 대상, 중심과 주변으로 이분화 된 서구사상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지만, 동아시적 선이 보여주는 억압 없는 삶과 세계의 창조적 자발성에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날이 바뀌고 해가 바꿔도 달라질 것 없는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나’가 아니라, 나날이 또는 매순간 새로운 ‘나’를 경험하는 우주적 주체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단숨에 윤사월 지리산 꼭대기에 오르니      四月直凌豆流頂
     산골짝마다 꽃들 환하고 새 울음 맑구나     萬壑花明鳥語溫
     하늘 가까운 큰 봉우리 하난 조상님 되고    一嶺近天爲高祖
     땅에 늘어선 작은 봉우리들 자손 같구나     千峰列地爲兒孫
     앉아서 보니 맑은 해가 눈 속에 떠오르고    坐看白日生眼底
     붉은 놀 푸른 바다가 서로 삼키고 내뱉네    紅霞碧海相呑吐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얼핏 보면,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선시 「천왕봉에 오르다(登天王峰)」)은 여느 한시(漢詩)와 다름없이 이른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의 옛 지명(地名)인 두류산 천왕봉에 올라 느낀 개인적 감회와 풍경을 묘사한 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두류산’ ‘천왕봉’을 ‘단숨에’ 오른 것이 단순히 물리적 등산보다 선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산골짝마다 꽃들’이 ‘환하’게 피어있고 ‘새 울음’ 소리가 ‘맑구나’ 라는 영탄의 주체는 이전의 ‘나’와 다른 주체이다. 이전의 진부하고 고루한 자기 동일성의 ‘나’가 아니라, 지리산 풍경들과 상호작용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나’를 뜻한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나’는 이제 단지 대상으로서 지리산을 대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 가까’이까지 뻗은 듯한 ‘큰 봉우리’하나가 마치 역대 조사(祖師)와 같고, 그 밑에 ‘늘어선 작은 봉우리들’이 불제자들 같이 느껴지는 경지에 도달해 있는 ‘나’다. 이제 ‘나’는 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흔적이자 상감(象嵌)으로 시시각각 거듭나는 ‘나’의 관점에서 눈앞의 대자연과 마주하고 있다. 즉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대낮의 해가 자신의 눈동자 속에 떠오르고, ‘붉은 놀’과 ‘푸른 바다’가 ‘서로 삼키고 내뱉기’를 반복하는 것은, 보는 주체로서 ‘나’와 보여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남을 뜻한다. 한 순간이나마 주체와 대상이 서로 마주대하며 보는 자인 동시에 보여지는 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견성(見性)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듯 선의 정신은 ‘나’라는 완고한 자아나 의식에서 해방될 때 ‘영원한 생명’ 또는 ‘순수생명’이 초월된 ‘나’에게 훤히 드러나며, 불화와 적대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생성하기를 반복하는 대지와 우주와 융통하는 주체로서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선적 깨달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개별적 고유성을 긍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결국 그것들과 일치하는데 그 최종목적이 있다고 속삭인다.

인간과 자연과의 근본적인 화해와 만남

그러나 오늘날의 선이 단순히 자신의 건강 증진이나 정신적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이 서구의 ‘잃어버린 동양적 지혜로의 귀환’이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의 결과일 수 있으며, 특히 그것이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적 기계에 봉사하고 있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선에 대한 관심이 과학화 되고 상업적으로 악용되면서 세상에 대한 자비심보다는 순전히 개인적 깨달음이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현대인들의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이나 초월적 명상, 요가나 템플 스테이(temple stay) 등은 비록 변형된 형태일망정 참다운 자아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선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의 의미의 ‘불안’이나 ‘근심’이 인간의 실존을 본래적으로 규정짓는 시점에서, 존재론적 전환을 위한 모든 새로운 담론과 패러다임 모색의 일환으로서 선의 세계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한 서구적 담론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오면서도 끊임없이 그것들과 대결하거나 경쟁하며 의미작용의 모체로 작용해온 한국적 선의 존재의의는 여기에 있다. 어쩌면 서구보다 더 철저한 서구 근대를 절대시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근본적인 화해와 만남을 추구하는 선의 정신은, 여전히 상징화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상징화되기를 기다리는 빛나는 전통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언어라면, 무엇보다도 선적 언어의 새로운 발견과 창조적 조명을 통한 새로운 사유체계의 정립은 단순히 선 전통의 부활 내지 재창조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한 특정 종교의 차원을 넘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자기존엄과 주체성의 확보를 통한 참된 자기실현을 위한 불변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개인 간의 수평적 연대와 역사의 변화를 대자유의 대상으로 경험하는 열린 세계관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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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필자는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며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 이후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문학 산문집으로는 『들키고 싶은 비밀』(2005), 시론집으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2005)가 있다.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에서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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