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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일반 | | | 문화 |
[순례] 가평 현등사
 석주  | 2008·10·26 13:15 | HIT : 7,339 | VOTE : 2,823 |
2월 25일 도반들과 가평군 하면 운악산 현등사를 순례하고 주지스님과 차를 나누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謀스님의 말씀으로 경기북부에서 제일가는 수행터라는 현등사는 수려한 운악산과 하나되어 한마디로 수행하기에 참으로 좋은 곳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이 녹지 않아 미끌어지며 넘어지며 서로 끌어주며 올라가기를 한시간, 우아한 운악산과 소박하고도 깊은 현등사는 모든 피로를 넘는 기쁨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주지 법명스님의 말씀은 세상사는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였고, 고찰에서의 차맛은 마음을 더욱 깊게 하였습니다.  
지난 인연들을 되새기며, 암자와 선방은 언제라도 우리 보리도량 선재마을 도반들께 열려 있으니 오셔서 공부만 하시면 된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머무르고만 싶었던, 돌아오는 길에서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도량이었습니다. 언제 현등사 선방에서의 정진의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고마운 인연들 수행으로 보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인연들은 차차로 추가하기로 하고 우선 현등사에 대한 자료를 아래에 추가합니다. <석주 합장>


|  현등사역사와유물| 삼충단| 현등사전설| 조종암 |

현등사의 역사와 유물

위치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 163번지    ( 현등사 직통전화 : 031-585-0707 )

북한강과 가평 천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가평읍의 안산이 되는 높이 330M의 보납산이 있다. 선조 33년(1599)에 이 고을 군수로 부임해 온 석봉 한호가 민란의 평정을 기원하는 글을 써서 산중에 묻고 제사를 드린 곳이라 알려져 이 한호의 얼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들이 가평을 찾은 데에 어찌 그 이유만 있겠는가?  명지산, 화악산, 운악산 등 산들이 빚어 내는 절경과 그 산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수려함,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후함, 유유히 흘러온 역사의 잔잔함이 바로 가평의 모습이다

하면 하판리에는 경기의 금강이라 부르는 운악산이 있다. 연중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이니 산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그 절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산이다. 운악산은  다른 이름으로 현등산 이라고도 부르는데, 천년고찰 현등사가 이 산에 아늑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난 절이 대게 그러하듯 현등사에도 많은 창건 설화가 전한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승  마라 아미가 포교차 신라에 오자 그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을 운악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신라 말의 도선이 개경이 새 나라의 도읍이 될 줄 미리 알고 개경에 세 절을 창건하였으나 풍수상 동쪽이 허해 이를 보할 곳을 찾다가 운악산의 옛 절터에 절을 크게 지었다는 기록이나 얘기가 전한다.고려 희종 때의 보조국사 지눌이 서울의 도봉산 원통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동쪽에서 빛이 3일간이나 비쳐서 빛을 따라 이곳까지 왔더니 폐허가 된 곳에  관음당이 있고 빛은 그 옆의 석등에서 나오고 있었다. 보조국사는 여기에 다시 절을 지어 현등사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태종 11년(1411)에는 함허 대사가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또다시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이 절은 그 후 몇 차례 더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거듭한다. 현재의 건물 중 다 스러져 가는 산신각이나 18세기에 세웠다는 극락전을 제외하면 별반 오래된 건물은 없다. 이처럼 운악사는 그 이름에 비해 절 건물이 화려하지 않다.


6.25전쟁 때도 화를 입었으니 고색창연한 옛스러움은 느끼기 어렵다.주의를 압도하지 않는 절 건물은 오히려 자연과 어울린 소박함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평의 역사를 더욱 잘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가평읍에 있는 '한국 전쟁 참전기념비' 가 보여 주듯 현등사도 현대사의 상처를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자랑할 만한 역사의 흔적이란 화려함에서 오지 않음을 현등사에서 느낄 수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단으로 쌓은 돌 추대는 이것의 연원이 얼마인가를 따지기 전에 우선 편안함을 준다.오랫동안 잊고 살다 우연히  찾은 옛 물건을 대할 때의 느낌 같은 것이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들이 경내에는 여럿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된 석탑과 함허 대사 부도탑, 지진탑(地震塔)등이 그것이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탑은 원래는 5층탑 이었는데, 현재는 2층의 몸 돌과 지붕 돌이 없어져  4층으로 보다. 탑 전체의 아래쪽에 온갖 문양으로 장식된 부분이 기단부이고 이와 포개 놓은 듯한,문양 없이 외곽선만으로 감실 형태를 만든 부분부터가 탑신 곧1층 몸 돌이다. 현재의 형태 중 1층 지붕 돌 과 2층 지붕 돌 차이가 큰 것은 원래의 2층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추측해도 된다.


지붕 돌을 들여다보면 네 귀를 치켜들었는데 이는 고려 말쯤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갑것의 문양들도 조선 공예품에서 나타나는 문양들이 많다.이를 증명하듯 탑 속에서 나온 사리용기의 기록은 탑의 조성 연대가 성종 1년(1470)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석탑 아래쪽 돌축대 모서리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있다. 이 탑 역시 1층 몸들을 잃어버려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원래는 3층탑 이었는데 서 있는 위치부터가 여느 탑의 위치하고는 다르다. 보조국사가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풍수지리 설을 토대로 했듯이 이 탑은 그 이름부터가 땅 기운을 누르기 위한 지진 탑이다.

현등사의 기원이 신라 법흥왕 때로 그 당시에 이미 신라가 북한강 유역까지 점령했을까 되묻게 했듯이, 지진 탑에서 불교와 풍수지리의 뒤섞임을 엿보게 하는 역사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함허 대사의 부도 역시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함허의 부도는 강화도 정수사에도 있는데, 여기의 함허 대사 부도는 함허와 관련된 주창 설화 때문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함허 기화가 삼각산에서 오신산으로 가다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었는데, 갑자기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사슴은 간 데 없고 그곳에 옛 전각지가 있었으므로 절을 크게 중창했다는 얘기이다


현등사 삼층 석탑 (懸燈寺三層石塔
지 정 일     1974 . 09. 26
도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063-00-00-31  

신라 법흥왕 때 건조한 탑으로 높이 3.7 m 자연 석반을 지대석으로 하고,그위4각 하대석과 낮은 상태중석 다시 두터운 상대 갑석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는 4각옥신위에 1층 옥개석은  상대갑 보다 넓으나 2층부터는 옥과 옥개석의 차이가 차차 적어졌으며 각옥 개석은 귀가 들리고  곡율이 큰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은 방형< 方形 >의 지대석< 地臺石 > 위에 단층기단< 單層基壇 >을 놓고 그 위에 탑신부< 塔身部 >와 상륜부< 相輪部 >를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에는 종·횡선문< 縱·橫線紋 >과 연주문< 聯珠紋 >, 연화문< 蓮華紋 > 등의 조식< 彫飾 >이 있다. 탑신부에는 상하층 감축이 있어 안정감이 있으며 옥개석받침돌이 낮은 편이어서 주목된다. 상륜부는 화문< 花紋 >과 연주문< 聯珠紋 >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각부의 양식수법< 樣式手法 >으로 보아 고려< 高麗 > 말기< 末期 >에 속하는 석탑이다.

화담당,경화탑(가평군 향토유적 제1호)

이탑은 화담 박경화(1786-1848) 의 부도탑으로 서기 1848년에 세운 것으로 이부도탑의 주인공이 화담당은 1803년에 화양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고 지탁 대사의 법을 이어 받았다

그후 강원도 보계산  석대암에서 화엄경 .열반경 등을 연구하고 전국각지의 사찰을 순회 하며 67품의 계송을 퍼다가 만년에 이곳 현등사에 들어가 수도에 전념 하였다 또한 본탑은  운악산이 음기가 서려있는 산으로 매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앙기를 보강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한 선인들의 지혜도 되새기게됨

지진탑 (地鎭塔)                                
지    정   일      1983.09.19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017-00-00-31  

현등사 경내의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기단부 및 1층 탑 신석이 없어져 원형을 잃고 있다. 가장 하단에 있는 지대석에는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었고, 네 귀퉁이의 합각<合角>이 뚜렷 하다.

기단의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아래쪽에 부연<副椽>과 위쪽에 각형 2단 받침을 조성하였고 네  위퉁이의  합각선이 뚜렷하다. 탑신석 <塔身石>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각각 양 우주<隅柱>가,  옥개석의 하단에는 옥개 받침이 있고, 2층이 4단, 3층이 3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형식을 보인다. 낙수면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끝에서 급하게 반전<反轉>되었다. 각 층 옥개석의 위에는 탑신을 받기 위한 각형 1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보주 등의 상륜부재를 받치는 장식)만이 남아 있는데, 지름 5㎝의 찰주공<擦柱孔>(탑의 가장 꼭대기에 장식하는  기둥인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있다. 이 석탑을 지진탑이라 일컫는 것은 이 곳의 지기<地氣>를 진압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   종

조선조 15대 임금인 광해군 11년 (1619)에 제작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77 ㎝.지름 59  ㎝ 이다  임진왜란 뒤에 주조된 종 가운데에 해인사 대적 광전의 범종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삼충단

이 삼충단(三忠壇)은 조병세(趙秉世),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선생 세분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서기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였으며 드디어 국권마저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당시 조병세(趙秉世) 선생은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이 조약에 서명한 오적(五賊)을 처단하고 하루속히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倭憲)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 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고 최익현(崔益鉉)선생은 을미의 병운동(乙未義兵運動)의 태두이었는데 소위 오조약(五條約)의 체결을 보고 통분하여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 구금되었으나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한 충신이다.

민영환(閔泳煥) 선생은 시종무관(侍從武官) 이었는데 을사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이 삼충단은 일제치하이던 1910년에 설단(設壇)되었으며 1989년에복원하고 매년 11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내 건물
극락전은 긴댓돌을 여러벌 쌓아서 만든 석축기단위에 만든 정면3칸측면3칸 ,겹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보광전은 1987년 새로지어 "인법당선원"이라고도 하며 ㄷ자모형팔작 지붕건물이다
삼성각은 최근에 새로지은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이다칠성과독성,산신을 각각모셨다
요사체는 스님이 머무시는곳으로 일반 관리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장전은 최근에 새로지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해우소는 스님이 이용하는 해우소로 일반적으로 화장실에 해당된다
석축는 현등사 왼쪽면과 지진탑의정면에 2개소가 있다 석축의높이가 3m이상되고 아래 여섯 켜는 장방형 댓돌을엇물려 쌓았다
산신각은풍우에 시달린 낡은 건물로 정면1칸,측면1칸의건물이다 지금의 산신각이 1916년 당시의산령일 가능성이 있다

신성도는1997년에 조성하였다 백발과흰눈썹이흰수염의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앉아있는 산신도이다
지장보살도는 서기가 지워졌지만 1790년의 편년을 갖고잇으며 지본이다 가로179,세로150.5 cm이다
지장보살좌상은 改金을두텁께하엿고 대좌는 목재이며 불신은 철불로 추정된다 불신높이 36m이다
독성은 혼자서 스승없이 독수선정하여 도를 깨우친 성자로가로113.5cm,세129.5 cm이다

칠성도는 함풍11년(철종12년)화계사에서 제작하였다는 서기가잇으며 가로189,세로155cm이다
아미타삼존불은 극락전내 불단위에봉안된 아미타여래.관음보살.지장보살이다
법고는 지장전에 있으며 지름 133cm ,두께 116cm 높이103cm이다
석종형 부도로 높이 약130cm이다 지대석은 방형이며 ,탑신부는 배흘림이 원만하고,상륜부는 2단연봉형보주이다

함허당득통 승탑과석등은 높이는 약266cm 이다


현등사 돌우물

신라시대 우리나라에 불법을 전하러았던 인도승려 마라아미를 위하여 창간했다는 이 절은 무슨 일인지 자주 폐찰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전국을 순회하는 도중 마침 마일리에 있는 절에서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밤 칠흑같이 어두운 야경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저멀리 운악산 기슭에서 환한 광채가 비치므로 하도 이상하여 지형을 살펴 두고는 날이 밝자마자 그곳으로 빈 절터에 현등(懸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빛의 광채가 찬란하므로 이곳에 다시 절을 중건하고 현등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밤마다 괴상한 여인네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 오므로 인하여 주지로 오는 승려나 일반 승려들조차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거나 병이 들어 죽는 일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 절이 폐찰 되는 일이 많았는데 마침 함허 대사가 현등사를 다시 중건하고 잠시 주지로 있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함허 대사가 낮잠을 자고 있노라니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이 절은 음기가 가득하여 항상 습해있어야 되는데 물이 없으므로 음기가 동하고 있어서 여인네들의 소리도 들리게 되니 지금 곧 능선 둘을 넘어 가면 물이 흐르터이니 그 물을 끌어다 마시며 흐르게 하면 아무일 도 없을 것이다." 하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함허대사가 깜짝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꿈이 하도 신기하여 능선을 넘어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 나섰는데 과연 한에 물이 흐르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대사는 길이가 12자나 되는 나무수채 60여개를 만들어 연결하여 놓고 물을 끌어다 마시며 흐르게 하였다.  그후 산신각을 지어 놓고 산신령깨 경배드리니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다시 나타나서 " 이제 이 절을 내가 지켜 줄 터이니 다른 곳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도록 하시오" 하고 신신각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이 현등사에는 밤이면 들려 오던 여인네들의 웃음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여 승려들이 절을 떠나는 일도 없어 졌다고 한다.

지금도 현등사에는 함허 대사가 물을 끌어다 만들어 놓았던 돌 우물들이 그 옛날의 정감을 먹음은채 말없이 놓여 있어서 찾는 이들의 감회를 새롭게 해주고 있다.



선녀탕과눈썹바위

운악산 현등사 아래편에 있는 선녀탕(仙女湯)은 이름만 들어도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잠겨져 있는데 이곳에는 그 이름 만큼이나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옛날 선녀들이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며 노닐고 있었는데 마침 운악산에 올라와 산심세를 하고 있던 총각하나가 산 중턱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고 바위 옆에 숨어 앉아 여인네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선녀들은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바라보며 눕기도 하고 한가로이 목욕을 즐기다가 모두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넋을 잃고 구경을 하던 총각은 자신도 모르게 산을 내려와 선녀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 중에 치마 하나는 훔쳐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숨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후 잠에서 깨어난 선녀들이 각자 옷을 찾아 입게 되었는데 한 선녀의 치마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선녀들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 되자 선녀 하나만 남겨둔 채 모두 하늘로 날아서 올라가 버렸다

날이 어두위지자 총각은 산에서 내려와 만나 집으로 가기를 권했는데 여인네가 치마가 없으니 함께 갈 수가 없다고 하자 총각은 품속에 간직했던 치마를 꺼내어 입히게 되었다.

선녀는 치마를 다시 입자 총각에게 이르기를 내가 다음날 다시 이곳으로 올 터이니 그때다시 만나 집으로 가자고 하며 홀쩍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이튼날 날이 밝자 마자 총각은 그 선녀를 다시 만난다는 기쁨과 설레임을 간직하고 선녀탕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로 올라가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녀는 하늘에 올라가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내려가지 못하는 계율에 매여 버리고 말았다. 총각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하루,이틀,몇,달,몇, 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이내 바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바위는 눈썹바위라고 하는데 지금도 어느 안개 자욱한 날이면 총각의 애타는 기다림 의 징표라도 하듯 이 눈썹바위는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이 완연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고 전해 내려온다.


조종암 (朝宗巖)  
도기념물 지정번호      028-00-00-31

하면 대보리에는 조선 후기에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치자는 유생들이 정신적 지주처로 삼았던 조종암이 있다. 조종천을 따라 조종암으로 가다 보면 아름다운 가평의 산과 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종암은 사무사(思無邪) 등의 글귀가 적힌 바위를 일컫는다.

숙종 10년(1684)에 당시 가평 군수였던   이제두와 지방 선비 백해명이 중국의 허격과 함께 새겼다고 한다. 사무사(思無邪)란 생각함에 그릇됨이 없다는 뜻으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친필을 가져다 새긴 것이다. 이 아래로는 '만절필동재조번방 (萬折必東再造蕃邦)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 이란 글귀가 뚜렷하다.

앞에 것은 선조의 친필로 여러 어려움에도 동방으로 와 조선을  살렸음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린  글로 서체는 송시열의 것이다. '해는 저물고 갈길은 먼데 큰 아픔이 마음에 있다' 는 뜻이 서울 창덕궁 후원의 대보단이나 괴산 화양 서원에 있던   만동묘와 같이  명을 기리는 뜻이   담겨 있음은 틀림없으나 이를 해석함은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해도 좋겠다.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에 청에 당한 굴욕은 당시 선비나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갔던 봉림 대군, 곧 효종의 북벌운동 또한 흐지부지 끝나 버린 시대 상황에서 성리학을 숭상하던 선비들은 이러한 글귀로나마 마음을 달래고 의를 새김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져 버린 명나라를 섬긴다기보다 청나라에 대한 울분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 보아도 좋다.

大統廟는 조종암과 관련이 있다 숙종10년 가평군수 이제두 등이 송시열의 지도를 받아 이곳 암면에 각서하고 명다라 후손 구의사가 이곳에 이주하여 단을 만들어 대통행묘와구의사행이라하였다
朝宗齊는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형태 건물이며 ,내부에는 祭具등이 보관되어있다마루벽에는 朝宗齋라고 쓴 편액과함께 1977년조종재 재건당시 쓴 조종제중건기와 함게 걸려있다
見心亭은 다른글자와 달리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 조종암으로 올라가는 맨아래쪽 우측에 필자로 새겨져 있다
記實碑는 1804년 조종암의 내력을 새겨 세운비다 비석의 크키는 가로72,세로75,높이63cm이다.글씨는 이조판서 김달순이 썻다

萬折必東 再造藩邪은 사무사가 각자 되어잇는 하단 우측에 새겨져 있다글자크기는 대략 22cm*44cm로 선조의 어필이라 한다
思無邪는 조종암 좌측암벽에새겨진글자로31cm*47cm 정도다 명나라 곡종의어필을 김상헌이 번양에 인질로 가있을 때가져 온것이다
기록제
중건기
통북문
대통묘 정문

2001/02/26(23:43
     
  [소설] 다비장 가는 길  신지견 08·10·27 8623
  [순례] - 전등사  석주 08·10·26 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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