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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만 하는 사람들
 박금표  | 2008·11·10 13:33 | HIT : 7,795 | VOTE : 3,470 |
공부만 하는 사람들 

언제부터인지 기복 불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불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소리도 높아졌다. 불자들이 불교에 대한 지식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복을 비는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 물결 속에서 불자들을 위한 불교 강좌들이 늘어났고, 불교 관련 서적을 읽는 단체들도 생겨났다. 또한 인터넷으로 불교 경전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사이트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금강경에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 공덕이 더 크다’고 했다. 이런 경전의 가르침 덕분인지 신심 깊은 단체나 개인의 법공양, 법 보시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경전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이고 그 궁극적 목표는 부처님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부처님 됩시다.’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닮아가야 할 부처님의 모습, 우리가 이루어야 할 부처의 모습이 자신의 복을 구하는 기도만 하고 있는 모습일까. 혹은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는 모습일까.

몇 년 전에 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현지 가이드가 ‘태국은 소승불교 국가입니다. 한국은 대승불교 국가이지요?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아십니까?’ 이렇게 시작하여 유머를 섞어가며 대승과 소승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연못가의 나무 아래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연못에 빠졌다면 소승불교권의 스님들은 계속 수행 정진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권의 스님들은 뛰어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한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저내지 못하여 사람이 죽었다면 그의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을 해준다는 차이가 있다.’ 는 것이다. 웃음을 섞어가며 단체 여행객들에게 해주는 설명이 체계적이지도 않고 교리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도 아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자. 옆에서 누가 죽어가고 있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업이려니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옆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도 그 옆에서 복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하고 있거나,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흔들림 없이 경전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경전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함께 하는 경우는 사람들과 교류라도 하며 가끔은 동업중생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인터넷 경전공부와 방송 불교 교리 강좌가 활성화되면서 이제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처럼 양방향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방통행으로 혼자 공부에 전념하는 ‘나 홀로 불자’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공부의 열풍이 불면서 모든 경전을 섭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천수경, 금강경, 법화경은 물론이고 선사들의 어록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불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가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공부해서 무엇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린 시절 공부를 게을리 하면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공부해서 남 주나? 좀 열심히 해라.’ 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학생일 때는 공부해서 남 주겠는가. 다 자신의 실력을 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불교 공부는 공부해서 남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나아가서는 남이라는 생각 없이 내 자신을 대하듯 주변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돌아보는 것이 동체 대비심 아니겠는가. 경전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아상을 높이는데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경전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수험생이 시험공부를 하면서 모든 출판사에서 발행한 문제집을 다 풀고 나서야 시험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서울에 사는 사람이 대전에 가서 할 일이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대전에 도착하여 볼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집에 앉아서 서울에서 대전을 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검토하고 있다. 집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경우와, 집에서 걸어서 기차역까지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는데 완행열차를 타는 경우, 급행 기차를 타는 경우를 비롯하여 KTX를 타는 경우, 비행기로 가는 경우까지. 거기에 더하여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경우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돌아서 가는 경우, 중부내륙을 이용하는 경우 등 수없이 많은 방법이 있다.

그 많은 방법을 다 검토해보고 지도에 그려보고 노트에 적고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버스표, 전철표, 기차표, 비행기표 등을 모두 사서 모은다. 그것도 모자라서 대전에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을 끝도 없이 들으러 다닌다. 일생을 그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검토하다가 정작 대전에는 언제 가겠는가? 한두 가지  검토해보고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서 대전에 가는 사람은 당일에 대전에 도착하여 하려던 일을 할 수 있다.

출가 수행자가 아닌 세속 생활을 하는 불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경전 공부에 몰두하는 것, 사회적 역할과 자비의 실천은 가르치지 않고 ‘법 보시가 최고’라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 과연 기복 불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1년 쯤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한권의 경전도 제대로 탐독하지 못했지만, 우연히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한 구절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은 아내와 언쟁을 하고 화가 잔뜩 난 순간에 ‘과연 저 사람도 부처님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 역시 화가 난 채로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사람이 부처님이라는데 저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의 뒤에 서서 108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절을 반쯤 했을 때 얼핏 보니 그의 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거지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저런 사람이 부처님은 무슨?’ 하면서도,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해보자고 계속 절을 했는데 108배를 마치고 나니 아내에 대한 미움이 가라앉아서 먼저 사과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법화경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인지, 경전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를 새기고 외우고 또 외우고 있는 사람이 법화경을 제대로 배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한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이 구절이 이런 의미이니 잘 새기라고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오늘 배운 이 한 구절을 다음 수업시간까지 실천하고 다음 강좌 때 실천한 것을 이야기 해보게 하는 것이 경전 수업시간 다운 모습 아닐까. 그저 경전을 배우러 온 사람들은 인연이 있거나 선근이 있어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난주에 배운 문구 줄줄 외우고 있는지 못 외웠는지 점검 하는 것이 경전 수업다운 모습인가?

법문이나 경전 강좌가 단순한 경전 글자 풀이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경전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떤 형태의 어떤 내용의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법을 설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경전을 배운 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경전을 공부한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점검해주는 것이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다운 모습일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설하는 법사와 그것을 배우는 불제자들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 한 것이다. 그런데 법사는 경전 구절 해설만하고 불제자들은 그것을 마음에 받아 지니기만 한다면 소통이 아니라 일방통행인 죽은 법문이 되기 십상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법 보시의 중요성을 되새겨보자.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 공덕이 더 크다’는 가르침의  중요성은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해주는 것’에 있다. 받아 지닌다는 의미가 문장을 줄줄 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금강경에 설한대로 실천하고 자신이 그렇게 실천한 내용인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 아닐까. 단순히 금강경 구절을 외우거나, 글자로 만들어서 남에게 주라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위로와 격려의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받아 지닌’ 모습일 것이다. 아파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금강경 구절 읊어주고 있거나 프린트해서 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픔을 함께 한 후에 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었다고 전해주는 것이 ‘남에게 말해주는 것’에 해당되는 것 아니겠는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온전히 담고 있는 탄생게의 후반부는 ‘세상이 온통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이를 편안케 하리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나 홀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고통을 함께 하고 그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처님 닮아가는 일이고 불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구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불교인구가 절반을 조금 밑도는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를 가진 사람의 절반 가까운 인구가 불자라는 것이고 나머지 타 종교 인구 모두를 합하면 불교 인구보다 조금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자가 많은데 왜 불교는 늘 ‘열악한 환경’에 있을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원인은 불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거나,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복을 구하는 기도만 하는 구복 불교이든, 경전 공부만 하는 불교이든, 참선만 하는 불교이든 세상과 소통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공부만 하고 참선만 하는 불자들은 신행단체의 일에 관심이 없고, 세상사에도 관심이 없고, 천둥번개가 치는 대자연에도 관심이 없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 읽고 깨우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경전 공부를 통해 부처님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등장 배경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부파 불교 시대에 불교가 학문 불교가 되어 대중과의 소통이 안 되었고, 그로 인해 불교가 사회적 힘을 잃어갈 때 등장한 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좌부(Theravada)불교를 폄하하여 소승불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 불교는 부처님 법을 배워 세상과 소통하고 부처님 법을 통해 세상에 비전을 제시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문구 해석에 매달린 공부만 일삼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봄에 땅을 파는 것은 씨를 뿌려 새싹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불자들이 자비를 실천하지 않고 경전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봄부터 겨울까지 씨 뿌릴 생각 없이 땅만 파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스님이든 재가 불자든 법사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불제자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상생하는 경전 공부의 기회를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는 불교가 되게 해야 한다.

24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도 머지않았고 음력으로 해가 바뀌는 설날도 가까워지고 있다. 봄에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듯, 우리 불자들도 그 동안 경전 공부라는 밭갈이를 했으니 이제 자비의 씨를 뿌릴 준비를 해야 한다. 단순히 글자를 익히고 달달 외우는 법 보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법 보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자비와 지혜의 힘을 가진 법 보시를 행하는 불제자들이 많아지기를 발원한다.


2008년 01월 19일 (토) 17:34:00 사라스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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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다의 경악과 비통  운강 08·11·15 7661
  [책] 운명을 바꾸는 법(요범사훈 강설). 불광출판사. 2006.  석주 08·11·10 8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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