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리도량 선재마을 입니다 :::
반야심경 | 예불문 | 천수경 |
기초예절 | 사대진언 | 탱화 |
| 소리 | 공양 | 마음 |
사찰/여행
사진/미술
영화/책
집/차(茶)
음풍농월
야단법석은 원통 김광수선생의 법석(法席)입니다.


분류 일반 | 질문 | 답변 |
오늘은 특별한 날.
 원통  | 2008·12·02 18:09 | HIT : 8,276 | VOTE : 706 |


--------------------------
     오늘은 특별한 날.
--------------------------




나는 오늘을 내게 있어서 특별한 날로 하고자 한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요즘 나는 주제에 불교 이론을 공부한답시고, 책 몇권을 몇 달동안 방에 어질러 놓고서 살았다.


아시다시피 불교 이론이란 참으로 난삽했다.
또 그 아함경인지 니까야 인지는 양도 많았다.
한번씩만 읽으려고 해도 다 읽으려면 일년도 넘게 걸릴 터이었다.

누구나가 그렇지만, 속세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놈이
그것만 읽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밥도 먹어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출근도 해야 하고, 때로는 가고싶지 않은 자리도 가야하고. . .
그러다가 보면 (비록 불교서적을 읽는 일이 내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지나친 가정을 한다고 해도)  잘해야 그 책들을 하루에 두세시간 읽기도 힘든 일이다.
수십권이나 하는 니까야 전질을 사는 일도
나름대로 장애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걸 장만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뭘 해 주는 것도 아니다.

구사 7년 유식 3년이라고 한다던가?
불교로 밥벌어먹는 사람도 그것만 전문으로 해도 그렇다는데,

머리 갂은 사람들도 기신론이 어려워서 “깜깜귀신” 이라는데,
. . . .
그러나 그래도 우리같은 사람들도 못볼 것은 없다는 건 분명하다.

-----------------------

그 책들을 좀 뒤져보니,
대승불교가 有에 집착한다고 비난했던 소승, 소위 남방불교에

오히려 대승불교보다도 더욱 有가 아닌 “無”  “無我”에 대한 이야기가
더많이 나와 있었고,

空도리에 철저하다는 대승불교에는 오히려,
“네마음을 찾아라, 참나를 찾아라, 송장 끌고다니는 놈이 누구냐,” 하면서
一心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내면의 진리를 찾자고 주장하는 대승불교에서 또한
관세음 보살이나 기도, 염불, 저승, 극락 놀음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물론, “관셈보살도 네 안에 있다”는 말은
일부 입바른 소릴 하는 識者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辨明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 교리의 난삽함”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나를 지치게 했다.
말과 말이 꼬리를 물고,
증명되지 못하는 말들이 서로 설왕설래하면서
불교는 말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이런 공부를 전공으로 하는 불교학과 학생이나 교수가 부러웠건만,
이제는 “불교 공부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정말로 불교학과 학생이나 선생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
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과 3개월만에 !


물론, 그건 全的으로 내가 무슨 일이건 진득하니 오래 하지 못하고, 쉽게 지치고,
변화를 좋아한다는 그런 나쁜 心性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 자신을 달래가면서 계속 나의 온 인생을 바쳐가며 해야 할 그런 공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기야 그러기에 달마 스님이나 육조 혜능도 이런 일은 아니 했을 것이다).

어떤 불교 理論 하는 사람이
“달마나 육조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불교가 아니면 또 어떠랴.
또 불교냐 아니냐를 이론으로 따지는 것이 그리도 중요하겠는가.
(왜냐, 나는 불교로 밥 벌어먹을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불교로 밥 벌어먹는다 한들,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유마힐의 입불이법문 아니던가.)

---------------------------------

우리집  케이블에서는
불교TV는 16번이고, CBS 가 15번, 평화방송이 17번, 기독교방송이 14번이다.
불교 TV에서는 자나깨나 49재 보험, AIG보험, 무슨 신발 선전, 절 선전 하는 동안에도
14, 15, 17번 케이블에서는 계속 하나님 말씀을 해 댄다.

목사님들은 너무도 말씀도 잘 하시고, 노력도 많이 하신다.
사실 나는 우리 불교가 그런 분들의 설교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많은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엄청나게 큰 교회에서 구름같이 모인 많은 대중들에게 설교를 하고,
장엄한 교회음악과 찬송가가 울려 나오고,
목사님이 먼저 신나게 찬송가를 노래하신다.

저들은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우리 스님들은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국민들에게, 시민들에게, 신도들에게, 신자들에게 얼마나 다가가려고 애쓰고,
지친 그들을 달래 주려고 애 쓰고, 용기를 주려고 애쓰고, 그들의 생활을 정화시키려고 애쓰고 있는가.

홧김에라도 확 개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과학은 많이 발달하였다.
불과 10년만 지나도 컴퓨터가 고물이 되고, 컴퓨터 서적을 모두 내버려야 하고,
한자로 된 책들은 서점에서 모두 제거되어야 하고
(요즘 대학생이건 과장님이건 한자로 된 글은 읽을 수가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들에게 발견된지 불과 600년 만에,
세균이나 세포가 발견된지 불과 200년만에,
페니실린이 발명된지 불과 100년만에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해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장 오랜 것, 고대로 고대로 올라가서,
무엇이 가장 오랜 것인지를 찾고 있고,
가장 오랜 것이 가장 옳은 것으로 치부되는 --“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만이.

1500년동안 한자를 사용하며 해왔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그것이 부처님이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라고 해서” 등한시되고,
30년전에는 산스크리트 배우기에 열을 올리더니
지금은 빨리어 배우기에 열을 올린다.

빨리어만이 옳은 것인가?
빨리어로 된 것이 가장 부처님 진의에 가깝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건 일부 학자들, 먹물(墨水)들이 한 얘기 아니던가?
부처님께서 그리도 말과 문자가 중요하다고 하셨던가?


우리는 <말이나 文字, 論理로는 眞實을 전할 수 없고, 진리를 표현할 수도 없다>고
너무도 오래 너무도 많이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이리도 온 불교집안이 말과 문자에 매달리고, 빨리어에 목매달고 있는가?

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국민들에게, 시민들에게 感化를 주고, 福音을 주고, 도움을 주고, 그들의 苦痛을 덜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에,
2천년전의 글짜인 빨리어에나 시간과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과연  잘하는 일이라고 하시겠는가?

부처님 말씀을 알기 위해서 니까야 20권을 읽어야 하는가?
그걸 다 읽으면 잘 알게 되는가?
그걸 다 읽으면 초선, 2선에 들고, 범중천에 가고, 광과천에 가고,
비상비비상처천에 갈 수 있는가?
부처님은 니까야를 다 읽어서 부처님이 되셨는가?

쉽게 말해서 나는 이렇게 해서 불과 3개월만에 니까야 읽기에 지쳐버린 것이었도다.

----------------------------------

또다른 나를 질리게 한 것 중에서는 唯識과 空의 논리도 있다.

나는 40년 전에 “의상조사 법성게”가 너무 좋아서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효스님의 유명한 일체유심조도 마찬가지다. 나는 군대 시절에 (근무를 거의 전폐하고)  김동화 님이 쓰신 “유식 ” 교과서도 마스터했다.
그당시 나는 5위백법을 암기장에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외웠다 (그건 30년 전이다).

그리고 나는 용수의 중론이나, 최근에는 김성철교수의 중관철학도 공부하려고 했다(그래도 그건 유식보다는 이해가 잘 안되었다). 물론, 여러 유식관련 강의도 들었으며 그 강의 내용에서는 “저 정도 내용이라면 나도 안다”는 정도의 생각도 대개는 했다.

그럼에도 나를 지치게 한 것은,
그때 당시에 무수 찬란하게 전개되었던 논쟁들,
즉, 유상유식이냐, 무상유식이냐,
對境이 實在 하느냐, 아니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느냐,
혹은 대소승의 대립인 (각묵 스님의 거칠고 무례한 원고 내용이기도 한) 無我가 옳으냐, 비아가 옳으냐, 아니면 常樂我淨이 옳으냐. . .이런 수많은 논쟁들이 아직도 안 끝났나 싶고,

불교를 전문으로 한다는 그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출중하다는 그 論師님들이
(바수반두나, 찬드라키르티나, 월칭, 호법, 산타락시타나, 뭐 그런 이름쯤은 줄줄이 외울 수 있다.) 여전히 결론을 못 냈고, 아직도 그 논쟁은 계속중에 잇다는 사실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기 600-700년경에도 피터지게 계속되는 그들의 논쟁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한국에서는 원효가,
중국에서는 헤능이 깃발을 날리고 있는 당시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원효가 바수만두를 못 읽어서 속상해 했겠는가,
혜능이 까밀라실라를 몰라서 뭘 못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런 논쟁들이란 게
부처님께서 이런 질문을 밧챠곳타(Vachagiotta)에게서 받았을 때, 대답을 안 하셨던 (요즘 니까야에서 보았다) 그런 종류의, 즉 무기(無記)로 분류되는 주제들 아니던가? 부처님께서 "온 국민이, 온 불자라면 이런 교리적 논쟁에 모두모두 동참해라" 그렇게 말씀하실까? 혹은 부처님께서 "온 비구들은 포교 그만두고, 교육 그만두고, 참선 그만두고 이런 논쟁에 동참해라" 그렇게 말씀하실까?

"그러니, 교리 논쟁이란 것은 다 그러고 그런 무익한 논쟁에 속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d이런 발칙한 생각이 내게 슬슬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교리를 다룬 서적들을 기웃거린지 불과 3개월만에 지쳐버린 것이다.

이런 얘기는
어딘가 니까야에서 본 듯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제로서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을
말로서, 논리로서 끝까지 알려고 애쓴다 (즉 말과 논리에 예속된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말씀에 충실히 하기로 했다.
즉, 말로 따지지 않기로 했다는 말씀이다.

無我면 어떻고,  有我면 어떤가.
對境이 존재하면 어떻고,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면 또 어떤가.
즐기면 되는 거지.

영화가 영사기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모르면 어떤가. 재미있게 보면 되는거지.
그녀의 구조에 대해서 모르면 어떤가. 만나면 좋은 것이고,
성행위에 따른 감각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알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

그래서 나는 말과 논리를 무시하고 비논리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첫단계로,
우선 과도기적으로 시(詩)에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아울러 나는 음악을 좀더 생활화하고, 영화도 좀더 자주 보기로 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민족사에서 나온 “공의논리. . ”뭐 이런 골치아픈 책과 씨름하느니 보다는
케이블 TV에서 주야장창 해 주는
(불교 TV가 무상사 원불모연 선전하는 동안에도)  
목사님 설교도 열심히 들어서

나중에 혹시 “불교 설법 기법”이라는 분야에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무능하고 나태한 한국불교에 대해서
전국의 보살님들이 거국적으로 반기를 들기 전에,
잘난 대한민국의 불교는  최소한의 고객관리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오늘은 2008년. 12월. 2일이다.
===============================================
     
  다시 윤회, 전생에 관하여 [1]  원통 08·12·08 8169
  퍼옴: 무아냐, 마음이냐.  원통 08·12·02 2710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


Copyright(C)2000 선재마을 All right reserved.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로 봉은사 정문 옆, 2층 선재마을
Tel : 02-518-0845, 국민은행 818-21-0284-173 김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