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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은 원통 김광수선생의 법석(法席)입니다.


분류 일반 | 질문 | 답변 |
퍼옴: 무아냐, 마음이냐.
 원통  | 2008·12·02 11:10 | HIT : 2,884 | VOTE : 666 |
초기불교 일변도 유감.

아래, 현재 한창 활동하시는 각묵스님의 글을 옮겨 보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스님 말씀대로,
무엇보다도 공사상을 주장하고, 중관철학의 無我를 주장한다고하는 대승불교가 오히려 상주불변하는 마음을 설정한다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듯도 합니다.
반면에 有에 집착한다고 비난받아왔던 남방불교가 더욱 열심히 무아를 주장한다는 순기능적 측면이 강하다는 점도 인정을 하는 게 좋을 듯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불교가 그저 마음 타령만 하면서 마음에 안주한다는 반성도 필요할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래 각묵스님의 글의 내용은,
대승불교의 敎義 모두를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열반경에서는 마음을 항상하고, 즐거웁고, 주체가 있고, 조촐하다고 상락아정으로 장엄하게 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법화경과 화엄경에는 다양한 마음의 작용과 그에 따른 현실의 (찬란한) 작용은도 나타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는 시시한 대한민국끄트머리의 원효라는 非僧非俗의 居士만이 한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거대한 화엄경에서 거듭 확인한 것이고, 유식철학에서도 확인된 것입니다.

아래 스님 말씀대로라면 6조, 달마의 모든  가르침은 다 부정되겠군요.
하물며, 관셈음보살이나, 아미타 부처님도 모두 황당무궤한 마군이 말이 되겠군요.
그것 또한 상당히 지나치신 말씀아닌가요?

하기야 남방불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니까 남방불교 사람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거 아니겠어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정하지 않는 쪽은 남쪽 사람들이지요.  

북쪽에서는 저들을 소승이다, 즉 작은 가르침도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남쪽에서는 아예 이렇게,
"그건 비불설이다, 불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진공묘유의 이 마음이 어디 가겠습니까마는 )


그러니,
남방불교의 교의도 소중하지만,
적어도 각묵스님정도 되는  영향력있으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상당히 경솔하시고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아래 많은 여러분들의 댓글도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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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절대화’ 유감  

논설위원ㆍ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욕먹기로 작정하고 한국불교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쓴 소리를 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마음의 절대화’를 들고 싶다. 한국불교 전반에서 마음은 외도의 창조주나 하나님이나 천주나 알라나 브라흐마처럼 절대화되고 신성시되어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며, ‘일체유심조’는 신통방통한 주문으로 통하고 있다.

조건발생일 뿐인데…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는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아비달마-중관-유식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주류에서는 무언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와 세계의 안이나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고정관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는 무아를 역설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절대화해버린다면 그것은 즉시에 불교가 아니게 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마음을 절대화하여 이것을 불생불멸이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과 하나 되고 이것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많다.

요점만 말하자면,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기경전들의 수백 수천 군데에서 마음을 포함한 오온은 조건발생(緣已生, 緣起) 일 뿐이고,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할 때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생겨서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린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직설과 정면으로 맞서는 외도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입각처가 생겨야 불교적 수행이 시작된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깨달음은 마음과의 합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 등에 대한 염오(넌더리, 구역질, nibbida)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부처님께서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마음이 무상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남북방 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찰나(khana)’와 ‘흐름(相續, santati)’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전찰나의 마음이 사라지면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서 찰나생.찰나멸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등무간연)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을 비롯한 마음은 전변하는 것이요(識轉變), 안혜(Sthiramati) 스님은 이것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찰나와 흐름으로 멋지게 정의하고 있다. 찰나와 흐름을 이해 못한 교학과 수행은 불교가 아니다.

믿지 말고 보아야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설이요 잡설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깨닫지 못한다. ‘절대’는 복종과 섬김과 충성과 합일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믿음은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왜 마음을 절대화하여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마음은 믿지 말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찰나성과 상속성과 조건성과 허망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마음의 절대화가 존재하는 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교신문 2480호/ 11월29일자]
2008-11-26 오후 1:19:23 / 송고  




댓글 12 개 이 글을...(0)
  
돛단배 이번 주제(무아)와 관련해 읽어볼만한 글이라 생각되어 가져왔습니다. _()_ 08.11.27 14:23
답글  초심
마음을 .. [전찰나의 마음이 사라지면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서 찰나생.찰나멸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찰라생멸 실체]로 보는 게 아닌가요? ^^ 08.11.27 20:24
답글  초심
[마음을 절대화하여 이것을 불생불멸이요]에서.. 불생불멸이란.. 생이 생기지 않으니 멸이 있을 수 없다는.. [찰라생 찰라멸 실체]까지 부정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 입니까? ->> [한순간도 실체가 없다는 무상이요, 그러한 무아] 아닐까요? ().. 환자를 치료하려면 무엇이 원인인지 확실히 알아야지.. 잘못하다간 환자를 더욱 고통스럽게만 할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환자에 비견되지만.. 초기불전원의 진단(診斷)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 08.11.27 21:40

답글  노랑
1.[마음을 절대화한다.]라는 주장은 여래장,불성,진아,대아, 일체유심조등의 대승불교의 언어를 비판하고 계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오온이라고 표현하고 12처라고 표현하면 절대화되지 않은 걸까요? 초기불교언어와 대승언어를 이렇게 비교한다면 대승언어를 잘 관찰했다고 볼수가 없다고 보여집니다.대승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에 포커스를 마추어야 할것입니다. 08.11.28 02:34

답글  노랑
2. 세친의 찰라설은 유부의 해석을 비판하고자 나왔습니다.먼저 존재입장에서보면 보면, 유부는 ‘일체,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은 존재한다’고 하는 ‘삼세실유설’을 주장합니다. 이에 세친은 오직 존재하는 것은 현재의 한 찰나일 뿐, 과거나 미래는 실유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즉 세친은 모든 존재는 생하자마자 멸하는 바로 그 찰나에만 존재할 뿐, 과거나 미래에 변하지 않는 어떤 자성(自性)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08.11.28 02:29

답글  노랑
두번재로 인식면의 주장을 보면- 대상에 대한 인식이란 대상이 존재 그 자체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소멸했기 때문에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한 찰나 전 존재했던 대상이 남긴 표상, 즉 이미지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는 이미 소멸했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과거나 미래는 실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08.11.28 02:17

답글  노랑
그러나... 이러한 세친의 견해는 비판을 받게됩니다.찰라연기라는 말은 아비달마불교에서 연기를 설명하던 개념입니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연기를 선후관계의 인과관계로 파악하여 연기의 지분들이 원인에서 생겨서 결과를 낳고 사라지는 기간이 매우 짧은 찰라라는 생각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러나 연기는 원인과 결과를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는 인과율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의존하면서 공존하는 상호인과율입니다.찰라를 어떻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찰라는 시간의 존재관념입니다. 08.11.28 05:27

답글  파초
마음을 절대화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런 것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라면 누가 그렇게 이해하겠습니까? 마음은 항상 변하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다 아는 것인데. 그렇다면 절대화라는 말은 마음이 항상 그대로 있다는 뜻도 아니라면, 절대화라는 의미가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이 없는 삶이 있을까요? 그것을 절대화라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08.11.28 17:20

답글  파초
또한 마음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 마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불교의 내용이 아닙니까? 인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십이입처라는 것도 그렇고 다 마음 연구하고 마음 닦는 것인데,, 당연히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통방통한 주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유식학에서는 외부 경계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식뿐이라는 이론도 있는데 말입니다... 08.11.28 17:26

답글  노랑
혹시 무아를 절대화한다 라는 말은 어떤가요? 08.11.29 14:48

파초
무아는 절대화할 필요없이 상주하는 원리라고 생각하는데요. 08.11.30 14:36

초심
12연기법에서 보듯.. 무엇을 좋아하여(愛, 執着) 취(取)가 생기면.. 이제는 그 무엇과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을 폄하하기 시작합니다. 수행을 했어도.. 촉 연기를 멸하지 못하면.. 나를 올리고 상대를 내리려 애를 씁니다. 08.11.30 15:14
     
  오늘은 특별한 날.  원통 08·12·02 8419
  기도와 성취  원통 08·11·17 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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