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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은 원통 김광수선생의 법석(法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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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 . . 주 예수와 함께 하면 어디서나 하늘나라. . . ”
 원통  | 2016·08·30 22:10 | HIT : 894 | VOTE : 175 |
401 “. . . 주 예수와 함께 하면 어디서나 하늘나라. . . ”

무심코 라디오를 트니, 귀에 익은 멜로디에 찬송가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 . .
내가 불교를 좋아하던 때가 언제부터이던가?
고등학교때는 “인생도처(人生到處) 유청산(有靑山)”이라는 구절에서 자주 안식과 위로를 얻고는 했었다.
청산(靑山)이라고 했으면서도, 나는 여름날에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산속의 시원한 나무그늘을 생각했었다.
그때는 더워도 오지게 더웠지. 충신동 산동네, 다닥다닥 붙은 방에서. 달아오른 시멘트 부로크 방에서. . .
어느 누군들 고생함이 없었으리요마는,
나는 나름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그런 말들로 달래었었다.

약간 불교 책들을 읽고 나서는 “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 이라는 구절이 좋았다.
어쩌면 그 구절 한마디가 평생 내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힘이었다.

무슨 많은 경전이 필요하겠는가.
무슨 많은 법문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의 인생은 이런 한마디가 결정한다.
여기에 무슨 법화경이 필요하고, 무슨 화엄경이 필요한가.

나는 완성된 인간이 아니기에,
나는 인생에 어려움이 많은 인간이기에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인간이었기에
“이른바” 불교공부에서 그것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개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 개업,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도 아니다.

선방(禪房)을 기웃거렸으나, 참선도 제대로 못하고,
불교책을 뒤적 거렸으나 이론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뒤늦게 결심을 하고, 그토록 그리던 동국대학교에서 불교 공부를 4년동안 했다.

그래서 불교를 얼마나 많이 더 배웠던가?
글짜는 배웠으되, 진리에 대한 이해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동국대 다니기를 권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게 분별력은 좀 생겼다. 나는 동국대 다니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분별력은 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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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알고나니,
내가 불교에서 배웠던 지극한 진리들이 다른 교리에도,
다른 진리책에도 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흔히, 칸트의 관념론과 불교의 유식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나는 칸트의 글에서 내가 유식공부에서 발견했던 내용을 그대로 발견하고는 놀랐다. 그런 얘기는 불교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심이 떨어진다고 한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2500년전 그리이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투스도 다 얘기했다.
스피노자도 인간인식의 허망성이나. 판단의 상황성이나, 뭐 그런 얘기 다 했다.
그런 걸 가지고 불교가 위대하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무식한 것이다.
(알고보니, 인문학자들은 대개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저 스님들만 그게 부처님 말씀에만 있는 줄 안다. 무식의 소치다)

“존재와 시간”, “존재와 무”. 그거 불교 교리에 해박하게 나와 있지만,
그 얘기는 부처님보다 훨씬 별볼일 없는 하이덱거나 사르트르가 이미 다 한 얘기다
에드문트 훗썰의 책을 보는 것이 불교책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불교의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불교학자도 있다.  
부처님의 진리가 하이덱거가 밝힌 저서 내용에 다 있다면 부처님도 별것 아니지 않는가.
그것 때문에 출가하고, 그것 알면 아라한이 되고, 생사를 초탈하고,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 되고, 그러는가?
그래서 하이덱거가 무상사(無上師), 천인사, 조어장부가 되었는가?
그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리, 진리라는 내용을 그런 철학자들도 다 생각했고, 저술도 남겼다.
그래도 부처니이 위대하다고 빡빡 우기는 것은,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 무식한 불자, 스님들 뿐이다. 나는 그래서 당혹스럽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구? 날보고 묻지 마라. 내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당혹스럽다는 거다.

이런 얘기는 동국대의 박인성 교수도 했는데, 나는 그걸 인정한다.
박교수는 그래서, 훗설책 번역하고, 그것 공부하는 것을 불교 공부 못지 않게 하는 것 같다.
물론, 김종욱 교수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하이덱거를 몰라서는 불교 안다고 못하겟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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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
지난번 올린 글이 너무 길어서 잘라서 다시 올리라는 친구들의 요청이 있어서 뒷부분만 다시 올립니다.

내가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라고 믿고 따랐던 것들의 대부분은 다른 가르침 체계에도 다 들어 있었다. 다른 종교, 칸트 훗설, 하이덱거 쇼펜하워 등등. . .
그 사실을 알고나니 그것이 나를 당혹하게 했다

이제 눈을 인도 쪽으로 돌려보면 또한번 당혹감을 느낀다.  황우성이 말대로,
내가 불교에서 배웠던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브라만, 우파니샤드에 그대로 다 들어있지 않은가.
내가 정말 절묘하다고 느꼈던, 나를 그토록 감동시키고, 개안(開眼) 시켰던 많은 가르침들이
“아드봐이타” 이론이란 이름으로 그대로 들어있지 않은가.
그것도 불교가 그토록 배척하는 힌두교, 브라마니즘 사상에. . . .
이건 정말 당혹스럽다.

더 나아가, “참나” 사상, 진아(眞我)사상은 또 어떠한가.
그것도 나는 정말 불교의 진리라고 생각했었다.
수많은 선사들, 중국의, 한국의 선사들께서 “참나를 찾아라”라는 말에 감복하고,
“그래 수행을 열심히 해야 “참나”를 찾지“
그렇게 생각해 왔던 기간은 또 얼마나 오래던가. (열심히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런데 그게 불교 이론에서 벗어난다구?
그게 아트만 사상이라구? 그게 불교가 배격하는 사상이라구?
그럼 불교란 게 도데체 뭐란 말인가.

불교란 게 알면 알수록 사람을 더 미궁(迷宮)에 빠트리고,
더욱 불교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말인가?
불교란 정말로 그렇게 별볼일 없는 것인가?
그러니까, 불교의 진수인 공(空)사상, 연기(緣起)법을 몰라서 그런다구?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니다.
나도 연기법 공사상,
당신이 아는 만큼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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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딱 한가지만 이야기하자.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처처안락국,
여기가 바로 극락이다.
극락 다른데서 찾지 마라.
평상심이 도이다.
일체가 유심조이다.
그것과,

처음에 이야기했던, 찬송가 구절,
“주 예수와 함께 하면 어디서나 하늘나라”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것이 나의 오늘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 물론 그것은 “대동소이”하다. 소이(小異). 작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종교가 다르다”고 생각(주장) 하는 데에 고질적인 종파성이 있는 것이다.
큰 눈으로 보면 같다.
같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큰 눈으로 보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큰눈으로만 보고자 한다.

나는 작은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작은 차이는 중요치도 않다.
(종교를 팔아서 밥벌이 하고, 논문쓰고, 차별성으로 이(利)를 취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같지 않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크게 보는 사람이다)

나는 대동(大同)만을 보고자 한다. 소이(小異)는 중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느 종교나 (그것이 올바른 종교라면)
대동만을 중요시 했다.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다.

내가 대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로 이야기한다는 게 부질없지만,
착하게 살아라, 원수를 용서해라, 거짓말 하지 마라, 생명을 중시해라,
이웃을 즐겁게 해라, 즐겁게 살아라, 희망을 잃지 마라, 물질을 탐하지 말아라, 안빈낙도 하라 뭐 그런 것들이다.
(비록 알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왜 이런 것들이 중요한가?
이런 것들이 안 지켜지기 때문에 인간이 괴롭고, 인간이 죄를짓고 인간이 벌을 받고 그런다.
그래서 많은 올바른 가르침들은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의 진리가 가르침마다 다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진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인생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 서로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 답이 정답이라면, 정답이 여러개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진리가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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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과거부터도 역시 유불선 삼교의 가르침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오늘날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오히려 불교 보다는 기독교 쪽이다.
물론 기독교가 불교보다는 독선이 더 심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교리의 좋지 않은 면이다.

(기독교 교리에도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이 있다
불교 교리에도 좋지 않은 면이 있다는 것을 솔직한 불자라면 인정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불자들의 생각과 판단에는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불교의 역사에 어찌 그토록 부끄러운 과거가 많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기독교 일각에서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운동이 꾸준히 있어왔다. 나는 그분들이 진지하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흔히, 종교다원주의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종교다원주의자이다.
실제로는 종교는 여러개가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의미에서 그것을 “종교일원주의”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일원주의란 단어는 이미 독선적인 기독교인들이 오직 자기들의 신만을 인정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써 왔기 때문에 의미상의 오염이 되어버린 말이다- 이에 관해 변선환, 오강남 같은 분의 글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래도 자신들의 교리의 흠결을 없애고 수정하기 위해서 이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는가.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이런 자세를 겸허히 배워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부처님의 진리가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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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개종(改宗)하는가?
그것 때문에 내가 개종할 필요는 없다. 부처님의 진리에도 그런 것은 충분히, 그 이상 들어있지 않은가. 다만
<인간에 관한 진리가 오직 불법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다른 진리체계도 충분히 인정받고 가치 받을 수 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흔히, 이것을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반면에 불교만이 가진 장점도 있고, 불교만이 가진 맛도 있고, 불교가 더욱 강조하는 것도 있다.
아, 물론, 그걸 다 알필요는 없다. 그걸 알기 위해서 동국대 다닐 필요도 없고.
다만, 잘 모르면서 불교만이 우수한 듯이, 진리가 불교에만 있는 듯이 생각하고 말하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더 나아가, 불교가 아니면 안된다는 듯이 (흔한 저질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당파적으로 흐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구태여 이런 말을 이제금 하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의 역사가 이런 당파성, 떼거리성, 진영논리(陣營論理)로 점철되어 오지 않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 저녁 나의 이야기가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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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오강남 교수의 비유를 사용해야겠다.
진리가 다른 데도 다 있는데, 여전히 불교가 좋고, 불교도로 남겠는가?
아, 물론, 불교의 교리가 치명적으로 오류라던가, 불교가 사교(邪敎)라면 불교를 버려야지. 그러나 그런건 아니다.
기독교가 뭐 불교보다 훨씬 잘났느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나 하이덱거 훗살이 부처님 진리보다 나으냐 그런것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부처님께서 보신 진리를 그 사람들도 다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강남 교수 비유대로,
나는 우리 엄마가 유일한 엄마고, 가장 훌륭한 엄마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우리엄마 최고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만한 엄마는 다 남의 엄마도 그렇더라.
그 엄마는 내 엄마고 내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에게는 또 그에게 소중한 엄마가 있다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세상에 그런 엄마가 하나 뿐인줄 알았는데, 그런 엄마가 또 있더라.
그러니, 내 엄마만 엄마라고 우기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 엄마가 내게 최고가 되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엄마와 나만의 20년 동안의 경험과 둘 사이만의 비밀이 있지 않은가.
<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나를 길러 주신 것은 내 엄마지 저 엄마는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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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불자들이 내 이야기에 찬동하지 않을 줄 안다.
“아니 그럼 아트만 사상도 받아들이라는 말이냐.”
. . 나는 아트만사상까지도 받아들일 용의까지도 있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하늘에 있고, 천국에 있다”는 하나님을,
그것이 “내 마음속에 있다”고 받아들인다는데,
나라고 기독교를 못 받아들일 것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사상의 금기시하는 경직성을 저어하는 게 불교 아니던가.

나는 유교의 가르침도 좋은 점이 많다고 본다.
사람이 문제이지 가르침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점을 모르고, 다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모른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상의 편의주의, 태도의 편의주의는 안된다.
편의주의와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다.
그건 구태여  설명을 안해도, 잘 알 것이다.

-끝-  2016.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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