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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은 원통 김광수선생의 법석(法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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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무아와 윤회 1
 원통  | 2016·08·30 22:17 | HIT : 1,093 | VOTE : 171 |
405  

5-윤회(輪回)와 무아(無我)-열반(涅槃)의 개념
5-a
여기서부터는 상당히 교학적인 얘기이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 그리고 이 문제에 의문을 느끼시는 분은 보세요.

윤회와 무아는 충돌한다. 솔직히 얘기하자. 충돌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도 인정하고,
오랫동안 많은 론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골머리를 싸맸다는 사실 자체가 이 두 교리가 충돌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윤회, 아니면 무아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불교의 기본교리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윤회를 버려야 한다.
윤회를 부정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공존할 수 없는 두가지 진리를 함께 제시하셔서
우리를 골머리싸게 만드셨는가.
야속하시도다. 알고 그러셨는가, 실수 하셨는가.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열반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해야 한다.
불교의 교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열반이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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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 Nirvana)이란 불교의 가장 중심 교리인데,
그 개념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문제 있다. 문제 많다.
네가 뭐길래 이런 큰 문제에, 불교 교리의 근간(根幹)을 뒤흔드는 문제에 감히 대어드는가.
그래도 문제 많다.

우선, 본론으로 가기 전에 열반에 관한 작은 문제부터.
열반이 무엇인가?
“죽고 나서 가는 것”? 물론 아니지?
그런데, 국민학생, 중학생은 그렇게 대답한다. 잘못 배운 탓이다.
보살님들도 그렇게 대답한다. 잘못 배운 탓이다.
열반의 정의(正義)는 ‘죽음’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버젓이 스님이 돌아가시면 열반이다.)
재가불자가 죽는 것은 왜 또 열반이 아닌가. 엉망 진창이다. 단어를 쓰는 것이.

열반이란, (사전에 찾아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당장 조회를 해 보아도 그러하다)  “불어서 끈다”는 뜻으로, 즉, “탐진치의 모든 번뇌가  불이 꺼지듯이 꺼졌다”는 뜻이다. 즉, 탐진치란 인생을 고(苦, 괴로움)로 이끄는 원인인데, 그 탐진치의 불길이 다 꺼졌다는 뜻이다.  (불교를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탐진치(貪瞋癡)란 인생고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탐욕, 욕애, 화내는 것, 미워하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을 뜻한다)

아, 잠깐, 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단어가 나왔는데, “번뇌”이다.
여기서 번뇌란 (煩惱, - 물론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번뇌망상의 번뇌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인생의 고(苦)를 일으키는 그 모든 것을 다 번뇌라고 한다.
그것이 불교의 정의이다. (불교학개론 맨 처음에 나온다)
그런데 선가(禪家)의 스님들이 그것을 “망상”이라는 뜻으로 그 뜻을 줄여(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번뇌는 가슴속의 갈등, 망상, 이럴까 저럴까 속 끓이는 것, 그런게 아니다.  인생의 고가 어찌 망상 한가지에서 다 나오겠는가.
그것만 보아도 선불교가 얼마나 불교의 진리를 왜곡했는지를 알 수 있다.
번뇌의 가장 중심은 욕애(欲愛)이다. 욕정, 탐심, 소유욕, 명예욕, 육욕, 성욕. .
더 나아가서 생리적 욕구까지도

이제  본론,
다시, 열반의 정의로 가서, 그러니까, 탐진치, “인간을 고통으로 이끄는 원인”의 불이 다 꺼진 것이 열반이다.
그러니까,
탐진치의 불이 꺼진다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인가 !
. . . . . .
열반은 정녕코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열반을 추구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이 한 인생” 잘 살자고 하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 열반 되면 무슨 소용 있는가.
그리고, 열반을 얻는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탐진치를 영원히 정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생고에서 영원히 벗어난다는 말이다. 해탈이다.
일단은(우선은) <해탈과 열반과 깨달음>을 같은 경지로 본다.
이게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인가, 죽어서야 얻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이것은 불교 교리의 가장 기본이다. 그런데, 하물며, 스님들이 이런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기는커녕 처음부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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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승에서는, 초기불교에서는, 인도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윤회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어서, <깨달으면 열반을 얻고, 그것을 얻으면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보았다.
“윤회에서 벗어난다. . . .”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열반을 얻으면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는 뜻에서 열반을 <죽음>과 연관시켰다.

그리고는, 열반을 얻으면 윤회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죽는 것을 무여열반, 아직 육체가 죽지 않은 것을 유여 열반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결정적인 오류가 생겨났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실 때에  
제자들이 “윤회”를 기정사실화하는 사고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누가? 제자들이. not 부처님이.

윤회라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윤회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지만)  불교보다는 아트만(atman)사상, 실체론, 고정적인 영혼관에 아주 어울리는 사상이다. 사실은 불교의 무아사상은 윤회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다. 그러나, 불교 이전에 이미 아트만 사상이 너무도 폭넓게 뿌리깊게 있었고, 그와 더불어 영혼관, 열반관도 있었기 때문에 불교도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면 안될 사상이었다. 무엇을? 열반을 죽음과 연관시키는 것을.

왜냐, 열반 (즉,깨달음, 해탈)은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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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b  열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는다구?
그렇다면 깨닫지 않으면 윤회한다구?
그렇다며 이 세상은 나쁜 거네?
이 세상에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 나쁜 거네?
그런데 왜 오래 살려고 해?
그런데 왜 생명 연장 해?
. . . . .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죽고나서 이 세상에 다시 오는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빨리 대답하라 !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그것을 끔찍하게 보았다.
그래서 기쓰고 이 세상에 다시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우리도 그러한가? 아니다. 단연코 아니다.
우리는 이세상에서 인간으로 오래 살고 싶다.
개똥밭에 굴러도 우리는 이승이 좋다.

우리가 왜 우리와 다른 사상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은 그렇게 끔찍한 세상이 아니다.
내가 불교 공부를 하고, 불교 수행을 하는 것도  
이 끔찍한 세상에 다시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 불교 수행을 한다.
확실히 하자.
내 불교 공부는 죽음과도 관계가 없고, 재생(다시 태어남)과도 관계가 없다.
나는 죽지 않으려고(생사 해탈을 하려고) 불교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이 세상이 싫어서, 이 세상을 기피해서
무슨 수가 있어도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고 불교공부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을 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가치가, 산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처음에 열반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인생에 대한 잘못된 시각(재생은 끔찍한 것이라는)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생이 끔찍하면 아기도 낳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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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대승 불교인들도 이런 모순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소승불교는 초기의 교리의 결함에 대해서 비판의식이 없었다.
(나는 그래서 남방불교를 미발달(未發達) 불교라고 생각한다.  비판의식이 없는 불교이다.
그들은 부처님 교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런 잘못된 생각은 결코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다. 초기 제자들의 잘못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잘못을 처음부터 잘 알았다.
더욱이,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따르자면,
보살은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깨닫고 나서 이 세상에 다시오지 않는다는 것은, 보살사상으로 볼 때, 전혀 옳지 않은 사상이다.
아주 이기적이 사상이다. 저혼자만 잘살겠다는 사상이다.
(지금도 남방불교를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잇다. 바로 그제 들었던 얘기다.)

보살은 살아있을 때 깨달아서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죽더라도 다시 와서 보살행을 해야 하고,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는 일년이라도 더 이 세상에서 살아서 중생을 위해야 한다.

거기에 이 세상을 혐오하고, 재생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디 조금이라도 있는가?
보살은 이 땅을, 이 국토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존재이지,
이 국토가 싫고, 두려워서 재생(再生)을 싫어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또한 진정한 보살행은 진정한 깨달음의 기반 위에서 나올 수 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깨닫지도 못한 존재가 보살행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 행위가 옳게 보살행이 되겠는가?
거기에는 판단의 오류가 있고,
무엇이 진정한 보살행인지 모르는 중생이 옳게 보살행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보살행은 깨닫고 나서 하는 것이 원래 정통 보살행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일단 모두 깨달은 존재들이다.

이론이 궁색해서, “보살은 중생에게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잠시 보류하는 존재들“이라는 말도 안되는 표현들이 아직도 버젓이 판을 치고 있다.  
보살이 보살행을 제대로 하려면 ① 깨달아야 하고, ② 이 세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보살이 열반에 들면 세상에 다시 안온다는 이론상의 심각한 오류가 노정된다.
그래서 보살이란, 중생을 위해서 “깨달음”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류하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리 오래, 그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다니.

무엇이 잘못인가?
여기서 열반이란 단어를 깨달음과 동의어로 보고, “죽음=열반=깨달음” 이라는 어의(語義)상의 오류로 위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보살은 죽는 것도 아니고, 열반이 죽음도 아니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 대승불교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라고 하면서, 열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차이도 모르지 않는가.  아직도 열반이란 말을 죽음을 표현하는 말로 쓰고 있지 않는가. 반성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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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c

그래서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고민을 많이 했다. 상당히 오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열반이라는 좋은 단어가, <죽고나서 이세상에 안온다>는 뜻으로 잘 못  쓰이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대승불자들의 생각은 결국, “열반” 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쓰지 말기로 했다.
그것 밖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정도로 열반이란 단어의 잘못쓰임은 심각했다)
그리고 “깨달음” 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쓰기로 했다.
그게 뭐냐구요? 바로 “무상정등정각”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단어이다.

(이건 뭐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교과서에 다 나오는 내용이고, 너무 유명한 이야기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거나, 관심이 없거나이다.).
반야심경, 273자? 그 짧은 글 속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 길다란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가? 여기에 의심이라도 품어야 하지 않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대체 뭐길래. . .

깨달음? 그럼 열반이지. 열반, 두자네. 짧고 좋네.
그래도 대승 운동가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글짜도 어려운자,
아홉자를 아무리 반복해서 쓸 지언정, “내 다시는 열반이라는 단어를 아니 쓰리라.”
왜?  잘못 쓰이는 글짜니까.
깨달음이라는 뜻을, “죽고 다시 이세상에 안온다”는 그런 잘못된 뜻으로 쓰니까.

금경경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물론, 법화경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뚜렷한 불교운동이었던 것이다.
깨닫고 죽고 이세상에 아니 온다는 것은 대승불교로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단어는 대승불교로서는 금기어이다.

또한가지,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굳이 열반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4종열반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열반에는 네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대승불교의 기본 교리인데, 스님들은 안 가르치시거나, 모르시거나 한다.
나 스님들에게 불만 많다. 참선만 최고고, 경전도 보지 말라고 하였으니 안 그렇겠나. 잘못된 가르침이다.

1. 자성청정열반
2. 무주처열반
3. 유여열반
4. 무여열반

여기서 대승이 강조하는 것은 당연히 2.무주처열반이다. 보살의 열반은 주(住)하는 곳이 따로 없는 열반이고, 생사가 따로 없는 열반이다.  어디에나 주하시는 열반이다. 죽고나서 다시오지 못하는 (인도인의 잘못된 생사관에 의거한) 그런 절름발이 열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무여열반 보다도 더욱 유여열반을 강조하였다. 죽고나서의 열반보다 살아서의 열반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승 열반경이 있는데 그건 예외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을 당시에 열반이라고 부른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초기에 제자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대다수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에  대해서처럼

이상의 열반 얘기로 “윤회와 무아” 이야기를 반쯤은 한 셈이다.
201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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