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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일체유심조 1
 원통  | 2016·09·01 18:11 | HIT : 759 | VOTE : 170 |
412  일체유심조 1

일체유심조는 유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유식불교가 전공이다. 그 중에서도 초기 유식)
이 이야기는 3회 정도 필요할 것 같다. 할 얘기가 많아서.
사람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보통 “일체는 마음이 만든 것이다”라고 이해한다.
그것이 원효의 가르침의 상징처럼, 혹은 선가의 상징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또, 유식(唯識)은 오로지 식만 있다. 이렇게 이해된다.
우선 유식부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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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흔히 불가에서는 구사 7년, 유식 3년이라고 한다. 아비달마 구사론을 배우는데 7년 걸리고, 유식을 배우는 데 3년 걸린다는 뜻이다. 유식 3년을 옳게 이해하려면 구사 7년이 필요하다는 뜻도 된다. 10년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사회에서 10년 과정(초중고 6년 대학 4년)  과정이 아니다. 스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뜨고는 그것만 해서 10년이다.

스님 생활을 속인생활로 착각하면 안된다. 속인이 하루에 두시간 공부한다면 스님은 하루에 적어도 10시간은 공부한다. 또 속인은 그냥 주어진 삶을 살지만, 스님은 공부하기 위해서(깨닫기 위해서)  사회도 부모도 집도 영예도 출세도 버리고 나온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 사라들보다 서너배는 더욱 정신을 바ㅉ딱 차려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10년을 해? 그럼 나같은 보통 사람은 평생을 해야 유식(唯識)을 이해하는 거네. . . .

내 얘기는, 그런데도 사람들은, 유식 책을 한권도 읽지 않고, 유식을 아는 듯이 얘기한다는 것이다. 스님들도 마찬가지다. 유식을 그렇게 공부한 스님은 거의 없다. 거의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도 유식이라는 한자 단어, 오로지 유(唯), 알식(識), 그 두자만 가지고 유식이 이러네 저러네 이야기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야기의 처음 시작부터, 참 기가 막힌다.
영어도 그렇다. "Consciousness only"  이것참, 국민학생이 ㅂ먼역한 것인지. 그러니 이걸 보고도, 아 유식이란 식만 있다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유식”이라고 번역한 사람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걸 번역한 사람은 저 잘난 현장(玄奘)이란 사람이다. 불전번역의 대가, 최고봉이다.
번역도 잘못 되었지만. 글짜만 가지고 알았다고 떠드는 이 천박함들이여.

우선, 오로지 식이다? 식만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물질도 없고, 대경(대상경계)도 없고, 산하대지도 없다는 거다.
아, 마음을 강조하는 거지. 오로지 마음! 그거야 선불교지. 선불교도, 유식도 오로지 마음을 강조하는 거지 !
그런건가? 그런거야?
물질도 없다? 물질이 없는가? 그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나?
그러니까 불교라구? 그러니까 불교의 진리가 오묘하다구?
제발 그렇게 불교를 신비적으로 보지 마세요.

또,이런 사람도 있다. <범부에게는 물질도 산하대지도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없다.>이것은 범부와 부처를 확연히 구분하고, 이해 안 되는 것, 불가능 한 것은 모두 부처가 되면 가능하다는 안이한 생각이다.
그것은 사실이 그렇지도 않지만, 그런  생각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부처라는 미지의 세계에 떠넘겨 버리는 것이고, 부처라는 환상에 모든 것을 미루어버리는 것이다. 그런사람들이 부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부처와 깨달음을 설정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조신하니 따져보자.  
오로지 식만 있다? 물질은 없고? 물질-육체는 없고, 식만 있다면 그건 영혼 같은 것인가? 의식인가? 의식하는 식만 있나? 그게 윤회하나? 그럼 무아는 뭐야? 그 식이 변하나? 그 식이 인연 따라서 변하나? 육체가 없고 식만 있으면 이 육체는 뭐야? 죽으면 그 식은 없어지나? 그러면 영혼관이네? 아니야?

그럼 뭐야? 아무것도 모르쟎아? 그런데 뭐 아는 체하고, 오로지 식이니뭐니, 불교는 유식을 얘기했네. . 하고 스스로 유식을 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체유심조 마찬가지지. 일체를 마음이 창조햇나? 마음이 일체를 창조한다고 믿는거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뭐야? 아무것도 모르쟎아?
그러면서 불교를 안다고, 원효가, 선종에서 일체유심조를 설파했다고 떠들고 다니는거야?
십보, 백보 양보해서, 깨달으면 일체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믿는거야? 잘 몰라?
불교공부 했다면서? 유식, 오로지 유, 알식, 불교는 “식만 있다.”고 주장한다? 잘 몰라? 그런데 왜 유식을 아는 것처럼 지금까지 행세했어?  

스스로가 이 문제에 관해서 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오로지 식만 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무리인지, 허황된지 생각해 보지 않고 쉽게 말하는가 말이다.
오로지 식만 잇는가? 아니면 유식이라는 말이 틀렸는가?
이걸 알기 위해서 유식 책을 한권이라도 펴고 공부해 봤는가?
그러면서 한자 글자 두자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유식을 아는 듯이 얘기해?

나는 유식이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스님들은) 글짜 한두자를 읽고 스스로 아는 듯이 착각하는 것이다. 그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없다구? 불교는 무아사상이라구?
“사람들은(불자들은) 유식에 대해서 모르면서도 글짜만 보고 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 이 부분의 목적이다.


12-2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불교에서는 물질이 없다, 외경이 없다, 대경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많은 불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유식불교를 전공한다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교를 잘못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교를 개인의 마음으로만 고착시키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사회에 댛나 관심을 없애고, 염세주의자, 열패자들의 중교, 이기주의자들의 변명의 종교로 만들고 잇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대상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대상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열패자들이 “유식”이라는 단어를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제논에 물대기”인데, 바로 그게 또한 유식의 대의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유식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할 생각은 없다. 출가해서 10년 걸리는 공부를 내가 무슨 수로, 무슨 이유로 여기서 읽으시는 분들께 다 이해시키려고 한단 말인가.
다만 나는 유식에 대한 오해를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그말일 수도 있지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느날 문득 차창 밖으로 커피집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봉천동 관악구청 옆이다)  “존재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으?! 눈이 번뻑 뜨였다. 세계는 존재의 표상이다?  그렇지, 세계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고, 표상으로 나타나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이 존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인간에게는 표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인간을 그 이상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표상은 보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동일한 대상이 사람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 . .  어? 저건 바로 유식 얘기네?

나는 그것이 유식의 대의라고 생각한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쇼펜하워’의 주 저작이다. 그는 30살에 그 저작을 완성해 놓고  70살때에 다시 그 책을 출판했는데, 전혀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충분히 완성되었다는 거다.
그 책의 정확한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데, 나는 그것을 “존재의 표상”으로 읽었다. 내가 읽고싶은 대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쇼펜하워가 “존재의”라고 썼기를 기대했다. 내용도 그러하다.
기실 이 부분은 칸트의 관념론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쇼펜하워는 칸트가 좋아서 평생 칸트책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병창 교수님, 맞나요? 아, 서양철학 교수님이 이걸 읽고 게시니 좀 뜨시네, , ,).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유식이란 것도 칸트, 쇼펜하워의 관념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해도 되겠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차이는 상당하다고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주는 상식의 파괴는 여전히 거대한 것이었다.
스피노자도 그런말을 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신의 의욕과 욕망을 의식하고 있다해도, 이러한 의욕과 욕망을 갖게 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한다.(고 말한다.)
의지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낙하하는 돌이 스스로 장소와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낙하한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전경갑, 《욕망의 통제와 탈주》47쪽.

물론, 이것이 운명결정론 같이 들리기 때문에 강호진 선생은 여기에 덧붙였다.
“스피노자가 인간본질에 대해 '욕망'이라고 정의한 것이나, 정신역동에 대한 서술은 기계론적이고 필연적인 관점에 기인한다. 겉으로는 스피노자가 인간의지의 수동성이나 운명론만 부각시키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너머의 '능산적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지(코나투스)를 겨냥한다. 불교교리도 욕망(갈애, 무지, 욕망)은 바탕으로 해서 업력의 필연성(인과론)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겨냥하는 것은 업력을 통해 드러난 운명의 필연성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 너머의, 혹은 본래 자유인으로서의 자유의지이다.”
뭐, 의지는 그렇더라도 지금은 “인식”과 “존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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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 우식이 강조하는 것도 수많은 철인(哲人)들이 다 얘기하고 느꼈던 것이다. 조금만 눈을 뜨고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다.
물론, 유식학은 거기서 더욱 깊이 들어가서 무척 자세하게 수많은 논설을 하고는 있지만 근본 대의는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부처님은 너무 당연한 진리인데도 인간이 미처 모르고, 못 느끼고, 혹은 알더라도 놔두고 생활하는 것, 그런 것들을 깨우쳐 주신다.  마치, 거짓말이나, 배우자와의 충실이나. 게으름이나, 육식, 살생, 물직적 탐욕, 교만심. . .이나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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