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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은 원통 김광수선생의 법석(法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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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종교적 심성
 원통  | 2016·09·20 09:16 | HIT : 663 | VOTE : 166 |
광수생각 17  종교적 심성과- 같음과 다름.

자. 이제 제일 처음의 논의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모든 종교는 같다고 했다. 그게 종교다원주의다
기독교와 유교와 불교와 이슬람과 힌두교와 샤마니즘과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거다.
그런데 이는 우선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 가운데서 생겨났다.
그리고 동양의 유불선 삼교가 다르지 않다고,
그 진리와 가르침을 합치시키려 했던 노력도 이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 선불교의 “참나-진아”가 브라마니즘의 atman과 유사하거나,
정토사상이나, 관세음보살 신앙이 타력신앙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비슷하다고 볼수도 있다고도 한다.
물론, 그래서 “종교는 대동소이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자, 그런데, “같다와 다르다”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인가?
실제로 모든 것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 각각이 다르고, 세포 각각이 다르며, 들꽃 각각이 다르다.
그래도 공통점을 근거로 같다고들 한다.

한양대학과 경희대학은 다르지만, 학교라는 점에서 같고, 대학이라는 점에서 같고, 사립이라는 점에서 같다. (아, 물론, 정말 좋아야 할 도서관이 무지 나쁘다는 점에서도 같다.-방학이라고, 주말이라고 문닫는 도서관이 그 무슨 도서관이냐.)

그렇다면 “같다와 다르다”에서 그 동이(同異)의 층위(層位)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같다와 다르다”는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동이의 수준이 없다면 “동이의 논의”는 모두 오류이다.

(“하나냐, 여러개냐”의 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걸 의상 법성게의 “일즉일체 다즉일”이라고도 하지만. 그걸 이렇게 본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논리의 수준이다. 혹은  불이(不二)법문(法問)에서도 이런 예를 드는데, 역시 아주 기초적인 수준일 뿐이다- 즉 법성게나 불이법문의 뜻은 이런 기초적인 논리 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그렇더라도. . .)

종교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모든 종교가 하나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심지어는 불교 내에서도 남방 상좌부와 대승, 선불교와 교학, 밀교와 화엄종, 등등이 큰 차이가 있고, 물론,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실체론을 인정하느냐에 있어서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교리의 차이가 있다.
그럼 이런 교리의 차이의 우열이 있을까?. . . . .
. . . . . .
나는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설명력(說明力)의 차이(差異)이고, 효과 (중생을 얼마나 이롭게 할 수 있느냐)의 차이이다. (진리의 차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진리는 어디나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니까).

그렇다면 나가 처음에 말한 “모든 종교는 하나이다”  라는 언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
그렇기도 하겠다. 역시 “하나냐, 여럿이냐”의 표현이 지극히 막연한 표현이듯이,
다만,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표현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도 종교로 인정하겠다>는 기독교선각자들의 노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들 생각으로 “종교라는 점에서는 같다” 쯤으로 보아도 되겟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건 하나마나 한 이야기 아닌가.
그럴수도 있겠다. 그건 기독교인들에게만 유효한 논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 인간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자신들의 종교와 지나치게 다르다고 하는 악습(惡習)에 배어있으니까.
이것은 집단심리이고, 패거리 논리이고, 종파적 편견인데, 이러한 종파적 편견이 지나치게 심하므로 해서  자신의 종교만을 옳음으로 받아드리려는 악습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
그런 면에서 대개의 종교는 (가르침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자각도 (매우)  필요하다.
이것은 “요청”이다. 이것은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고, 현실에서의 요청이다.
요청이란, fact 나, evidence, logic이 아니고, 현실에서의 requirement 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강조하다보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중교간의, 혹은 종교 내부의 우열(優劣)과, 리불리(利不利), 정사(正邪)를 지워버렸다.
이제 그것을 살려야겠다,

즉, 종교라고 다 좋은 거냐. 바람직한 종교, 그렇지 못한 종교도 있지 않느냐. 또, 교리는 좋아도 종교조직이나 교단의 실천이나 도덕성도 많이 다르지 않느냐, 세계를 설명하는 설명력에 있어서도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느냐. 차이가 난다면,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어느것이 더 낫냐는 구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불교라고 해서 다 좋으냐. 기복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불교(기독교가)가 기복(祈福)으로만 흐른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냐.
이런 수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분별하고 판별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말했던 “종교다원주의, 혹은 모든 종교는 다 같다” 는 주장은 (일견은 맞지만), 바람직한, 그리고 그렇지 못한 종교이론과 종교행태, 종교교단을 구분하지 않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이병창 교수의 댓글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끝-

(그런데 한양대와 경희대의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한양대에서 녹(祿)을 먹고 살고 있지만, 한때 경희대를 다녔고, 내 딸도 경희대를 졸업했다. 내게는 경희대에서 공부한 좋은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그래도 밥 멱여주는 데를 좋다고 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이것도 요청이다. fact라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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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33천, 28천이 마음속에서만의, 선정의 상태인가, 아니면 실제로 (인간 외부에) 있어서 인간이 윤회하는 곳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문제도 심각하다. 실제로 불교 교리는 이 문제에 대한 충돌을 방기하고 있다. 좀 무책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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