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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공사상이 연기법인가
 원통  | 2016·09·20 09:26 | HIT : 764 | VOTE : 164 |
광수생각20_공사상이_연기법인가.hwp (20.5 KB), Down : 2
광수생각  20  공사상이 연기법인가

역시 또 공(空, sunyata)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표가 깨져서 화일 올립니다.)

1.
공은 너무 이야기되어서 매우 진부하지만, 역시 그래도 불교의 대의가 공이기에 늘 또한 참신해야 하는 게 공이다. 그런데 이 공에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은 -그 사상은 주로 용수(龍樹)가 처음 제창하고 사용한 용어라고 하지만, - 반야경에서부터 나온다. 경은 누가 언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가 안 밝혀져 있기 때문에 공사상은 용수(들)의 사상이라고 하자. 그리고 이 공(空)은 다름아니라 연기를 뜻한다고 한다. (수많은 경전과 논서에도 나와 있다)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대의(大義)가 연기 사상이라고 한다. “인연하여 일어난다”. (緣起, pratityasamutpada)  혹은 인연법이라고도 하고, 혹은 인과(因果) 사상이라고도 한다. 인과까지 가면 내생까지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좀 멀리 나가는 거다. 암튼, 연기사상이 불교사상의 중심 대의라는 것은 대개 인정하는 것이다.

연기가 왜 공이냐. 인연해서 일어나니까.
모든 것은 ⓵변하고, 달라지고, ⓶지금 있는 것이 알고 보면 없는 것이고, ⓷지금은 이것인데 나중에는 저것이 되고, 또 ⓸지금은 이것 인 것 같아도 사실은 요소들의 결합이기 때문에(假合) 고유한 이것이란 없다. 대충 이런 뜻이다.
그래서 고유한 이것(실체(實體)- substance-그것이 물질이든 아니든, 보이는 것이든 아니든)이 있다는 생각, 그것을 실체론이라고 했고, 불교의 대의는 곧 실체론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수는 (반야경은) 모든 존재(제법)가 실체가 아니니까, 없으니까, 비었으니까 공(空)이다 그렇게 이름붙였다.  

그렇다면,
⓵ 왜 그것을 그냥 연기라고 하면 될 것을 구태여 다른 이름을 썼는가
⓶ 그리고 왜 그 이름을 공이라고 했는가. . ..

2.
불교 얘기하는데  공얘기 안할 수 없다. 반야심경, 금강경 얘기하는데 공 얘기 안할 수 없다. 한국불교에서 반야심경 금강경 얘기 빼면 쓰러진다. 그런데 이 공얘기 하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공에 대해서 확연히 이해했고 할 수 없다. 이해했다면 아라한인데, 나는 적어도 아라한이 못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님들, 법사님들, 교수님들도 그러하실 것이다. 확실히 모르는데, 신도들에게 가르치려니 곤혹스럽다.
신도들도 곤혹스럽다.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으니까. . .
모르는 사람이 가르치니 (나를 포함해서) 모를 수 밖에.

다만 공이 공이 아니다. 공이 텅빈 것이 아니다. 그런 얘기만 할 뿐이다. 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면 그게 단별공(斷滅空)이다. 혹은 공에만 집착하면 악취공(惡趣空)이다. 그런 얘기만 한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깨닫지 못한 나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더 이상 공이 뭔지는 나도 누구도 잘 얘기해 주지 못한다.
설령 더 얘기한다고 해도, 공이란 바로 인연법을 말한다. 연기를 말한다. . 하면서 위에서 말한 그 얘기들을 반복할 것이다.
과연, 공이 그런 것이라면 왜 용수는 구태여, 연기, 인연법 대신에 공이란 말을 했고, 공 사상을 천명했고, 그래서 그가 제2의 부처님이 되었는가.
“메리에게는 무언가가 있다”는 영화 제목도 있던데 용수(공)에게도 무언가가 있지 않다면 구태여 그에게 소승이 아닌 대승, 연기가 아닌 공을 얘기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3.
여기서 잠깐 곁가지로 가야할 것 같다.
흔히 연기라면 <상호의존적 연기>를 많이 생각한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 .” “한송이 국화꽃  피는 것과 소쩍새 우는 거에는 필연적인 연기 -상호의존적-가 있고. . .”  그러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기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지적되었다(上田義文). 이런 상호의존적 연기는 특히 화엄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우정백수가 연기를 설명할 때 많이 주장햇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거를 따져보자면 <중론송>을 해석한 月稱(짠드라끼르티, 스크리트 본)의 명구(名句)를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밧스키가 영역할 때 연기를 relativity 라고 번역하기 시작한데서 연유하는 오류라고도 주장한다.
그렇든, 안 그렇든, 화엄철학은 온통 이 상호의존성으로 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7세기의 법장(法藏)이 찬드라키르티가 쓴 명구를 본 것도 아니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한편 박경준은 화엄철학의 상호의존성도 훌륭한 사상이지만, 적어도 초기불교에서의 연기에는 “상호의존성”이란 개념은 안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즉, 상호의존론이 근거로 하는 니까야의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차유고 피유, 치기고 피기)” 에서의 피차(彼此)는 상호의존적 피차가 아니고, 12연기 공식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상호의존 사상은 나중에 화엄이 발전시킨 사상이다. 물론 용수의 8불중도에도 상호의존 사상이 있다고 생각해도 안될 것은 없지만)
12연기 공식, 즉, 무명 행 식 명색 육임 촉 수  등의 전개과정이 행에 의하여 식이 생기고, 행이 있기 때문에 식이 있고. . .그렇다는 것이다. 12연기가 불교 교리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늘 논의에서 공이나 연기에 상호의존  이야기는 좀 논외로 치자.

4.
중관사상을 줄기차게 연구하고 게시는 남수영 박사의 얘기는 아래 표와 같다

A 상호의존적 연기
세속제
= 희론(戱論)
속제
B 생성적 연기
C 팔불연기
승의제
무자성(無自性)=공이다
진제


즉, 상호의존적 연기는 세속제이고, 팔불연기는 승의제이다.
(나는 상호의존적 연기가 아니고, 생성적 연기라고 본다)
그리고 이 승의제는 세속제를 기반으로 해서 생겨났다.
그러니까, 용수(반야경)가 구태여 공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은 그동안에는 없었던 (숨겨져 있었던)  승의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옳은 이야기다.
그러다면 무자성=공이라는 공식으로 수렴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상호의존적  연기
생성적 연기를 기반으로 해서

무자성=공이 생겨났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라는 말이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속제와 승의제는 대립 관계에 잇다.
즉 세속을 부정해야지만 승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
생멸을 부정해야지만 불생불멸이 되는 것이다.
불이법문이란 즉 세속을 부정하고 승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상? 공이 뭐야? 그거? 연기법의 다른 말이야.” “연기가 바로 공이야” 이렇게 이해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연기를 부정하는 것이 공이다.
생멸법을 부정하는 것이 진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섞여있고 구분이 안되어서 엄청난 혼란이 온다.
스님들이나 법사님들이 이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말하니까 매우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5.
물론, 이 다음 단계가 있다. 진속(眞俗)이 불이(不二)이고, 眞空 묘유이고, 일심이문이고, 색즉시공이고. . .그러나 이건 이 다음 단계의 이야기이다.
즉, 산비산 수비수가 이야기가 되어야 산시산 수시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건 금강경, 반야심경 탓도 있다.
상호의존적 연기, 생성적 여기를 충분히 얘기 안하고, 승의제인 진여, 법계 반야 이야기도 충분히 안하고  색즉시공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공을 모르는 사람에게 “공이란 바로 연기를 뜻한다” 라고 한다면 반대로 말하는 것이 된다. 즉, 연기를 부정하는 것이 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기란 옳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연기란 불교 교리의 가장 근본 아닌가.  
그러므로 반드시 이 삼단계의 교리체계가 중요하다.

1. 생멸 인연을 이해하는 것==연기법
2. 생멸이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  =공
3. 생멸과 불생불멸이 둘이 아닌 것을 아는 것. =진속2제, 진공묘유, 일심이문.

6.
그렇기 때문에 무자성을 공이라고 표현한데는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무자성은 차라리 그냥 무자성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공이라는 단어는 “인연, 연기”를 극복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空의 진정한 뜻은 세속에서는 자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왜 공인가? 공이라면 빈 것인데, 무자성이 빈 것인가?
또 “ 공이 아주 빈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데서  마치 공에 어떤 실체가 있는 듯이 착각된다. 즉, 공이야말로, 사람들이 무자성을 깨우치는 데 아주 방해가 되는 용어라는 뜻이다. 무자성이 공(빈것)은 아니지 않는가.

7.
흔히, 공은 명사가 아니고 형용사라고들 말한다.
그럼 형용사인데 왜 공이라는 명사를 쓰는가, 그게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논의가 있다.

⓵ 아마도 당시 인도 사상계에 무자성을 뜻하는 사조로서, sunyata 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학파(이른바  외도) 에서도 널리 쓰이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반야경의 편찬자들은 불교에서 과감히 채용했던 것이다. .
그 sunyata란 사전적으로는 <부푼다, 혹은 속이 보인다>, 라고 한다고 한다(김영진) 또, 인도의 0 (zero)도 sunyata라고도 한다.
어쨎든 그래서 내 생각에는, 진리의 본질은 “무자성”이라고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無”  “不” “非”  이런 형용사나 부사이어야 하지, 공(空)이라는 명사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공이라는 말 자체에 어떤 실체론적 느낌이 강하게 들어있는 것이다.
빈 것이 아닌데도 빈 것이라고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⓶ 둘째로는 한문으로의 번역상의 문제이다. sunyata를 空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았느냐의 문제이다. 이건 쿠마라지바는 물론이지만. 그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기라성같은 (반야경의) 역경가들이 그렇게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분들이 그걸 空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감이 남는다.
그렇게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자성을 잘 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 이대로 두어도 되는 문제인가

적어도 이것이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문제제기만은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반야심경, 금강경에서 공(空) 이야기만 나오면 스님들, 법사님들, 교수님들이 이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된다.


     
  418. 열반하면 이땅에 다시 안 오는가 : 막연한 윤회  원통 16·09·2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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